프로이센의 군주/프로이센 왕국(1701~1918)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

Mintaka5 2025. 4. 3.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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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2세(Friedrich Wilhelm II, 1744~1797, 재위1786~1797)

  전임 군주 당시 재직 군주 후임 군주
프로필 프리드리히2세
Friedrich II
1712~1786
재위1740~1786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
Friedrich Wilhelm II
1744~1797
재위1786~1797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
Friedrich Wilhelm III
1770~1840
재위1797~1840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744년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Berlin)에서 아버지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프로이센(August Wilhelm von Preuβen, 1722~1758)과 어머니 루이제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부인(Luise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1722~1780)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프로이센 왕국 4대 왕으로, 전임 왕이자 백부인 프리드리히2세(Friedrich II, 1712~1786, 재위1740~1786)에겐 상속자가 없어 자신이 추정 상속인이되어 1786년 삼촌 프리드리히2세가 승하하면서 프로이센의 왕이 되는 인물이다. 현재 독일인에게 대왕이라 칭송받는 삼촌 프리드리히2세의 치세와 비교되어 상대적으로 무능했다는 인상을 주는 군주로 군대에 크게 관심이 없어 군사력의 저하를 불러일으키지만, 외교력 하나는 끝내줘서 오히려 11년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는 치세동안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를 외교로 오히려 확장시킨 장본인이다. 세금 개혁을통해 이전의 반강제적 징수를 완만하게 했다는 평을 받고, 국가간 외교와 경제, 무역등을 크게 확장시켜 관세를 줄임과 동시에 무역을 활발하기 위해 도로, 운하등을 건설한다. 1797년 53세의 나이로 승하하며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Friedrich Wilhelm III, 1770~1840, 재위1797~1840)가 프로이센 왕위를 계승한다. 

 

초년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백부 프리드리히2세의 동생이였으므로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는 프리드리히2세의 조카였다. 그러나 백부 프리드리히2세는 자식이 없었고 넷째삼촌 루트비히 카를 빌헬름(Karl Wilhelm, 1717~1719)은 2세로 요절,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빌헬름도 3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해버렸기도 했고 더욱이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Friedrich Wilhelm I, 1688~1740, 재위1713~1740)의 어이없는 행동(첫째아들 프리드리히 루트비히는 맏아들에게 왕관을 우겨 씌워 생채기 감염으로 사망, 둘째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대 사열식 대포소리에 발작을 일으켜 사망) 비록 정식 왕세자는 아니였지만 추정 상속자 취급을 받았다. 

 

즉위

I. 외교

1786년 백부 프리드리히2세가 승하 하면서 즉위하게 된다. 워낙 명성이 자자했던 백부인 대왕 프리드리히2세의 그늘에 가려져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가 즉위했어도 별 인기가 없었다. 혼인을 하고도 내연녀를 두기도, 재혼을 하고도 내연녀 사이에서 아이를 따로 낳기도 하는등 상당히 막장에 가까운 집안으로 혼란이 가득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는 운이 상당히 좋았던 듯 하다. 배경에서도 언급했듯이 외교력이 상당한 수준이였는데, 마침 즉위한지 3년만에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터지고 왕정이 몰락하고 공화정이 세워지면서 매우 혼란스러운 프랑스를 반대하는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게 연합을 요청하는데, 이미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로이센 내에서도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괜히 프랑스를 쳤다간 프로이센 내부에서 내전이 발발할 수도 있을 상황에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는 연합을 깨고 혁명 프랑스와 강화를 이룬다. 

 

II. 정책

백부 프리드리히2세때 행해졌던 프랑스식 세금 징수 제도를 개혁하여 도로, 운하등을 건설해 국가간 무역을 증대시키고 관세를 낮추는등 국가전반의 산업을 증대시키고 프로이센 왕국 전반의 경제, 재정 개혁을 하기 위해 뵐너(Johann Christoph von Wöllner, 1732~1800)를 기용시켜 담당케끔 한다. 공식적인 총리대신은 아니였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는 모든 권한을 부여해 개혁정책들을 시행하게끔 명한다. 1794년 해임될때까지  출판인들에 대한 검열 행사로 기존 책들에 대한 저작권을 보장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고 종교령을 선포함에 따라 안정적인 시민 사회를 유지하게끔 노력한다. 

 

III. 폴란드 분할

1791년, 필니츠 궁에서 신성로마황제 레오폴트2세(Leopold II, 1747~1792, 재위1790~1792)와 혁명프랑스에 관한 회의를 진행하는데,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 루이16세(Louis XVI, 1754~1793, 재위1774~1792)의 왕당파를 지지하는데 결정이 나고 프랑스를 치고자하지만 프로이센의 재정악화로 인해 황제 레오폴트2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를 신임을 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동맹이 맺어지고 프랑스 공략에 참여하는데 마침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미 프로이센과 폴란드 사이에 체결되어있던 동맹을 깨는 조건으로 러시아에게 보상을 요구한다. 마침 재정적 여유가 없던 프로이센은 최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차원에서 전쟁에 참여하여 분할몫을 받겠다는 의지를 가지고있던 상황이였는데 러시아는 프로이센의 요구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서폴란드를 분할받게 된다.  그러다가 1795년 프로이센은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2세(Stanislaus II Augustus, 1732~1798, 재위1764~1795)가 러시아의 압박에 도저히 이기지 못하고 퇴위함과 동시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프로이센은 리투아니아와 바르샤바등의 영토를 얻게 된다.  

 

승하

1797년 포츠담에서 53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이후 프로이센 후임 국왕은 장남인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Friedrich Wilhelm III, 1770~1840, 재위1797~1840)가 물려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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