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édéric II de Prusse, dit Frédéric le Grand(대왕), 1712~1786, 재위1740~1786
출생
1712년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Berlin)에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Friedrich Wilhelm I, 1688~1740, 재위1713~1740)와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 폰 하노버(Sophie Dorothea von Hannover, 1687~1757)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독일에서 대왕이라 불리는 인물로서, 1700대 계몽주의시대 유럽의 핵심격인 인물. 프로이센은 이 시기 이후부터 유럽의 중요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혹독한 어린시절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는 군인왕이라는 별명답게 광적일 정도로 군대 육성에 집착하고 혹독, 가혹하게 주변을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세자 신분이였던 프리드리히는 섬세하고 예술적인 감각까지 겸비한 인물로서 아버지와 완전 정반대의 성향을 지녀 아버지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거의 가혹행위에 가까운 수준으로 고통받는다.
국가예산의 80%를 군대에 쏟아부을 정도로 군대의 힘을 크게 신장시키고자 한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 왈 '맞을수록 강해진다'라는 일념에 말도안되는 이유로 매일 맞으면서 자란다. 아들이고 딸이고 폭력을 휘두른탓에 프리드리히와 사이가 좋았던 누나 빌헬미네(Wilhelmine, 1709~1758)도 프리드리히가 남친 한스 헤르만 폰 카테(Hans Hermann von Katte, 1704~1730)와 함께 도주하는걸 도와줬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른다. 프리드리히의 두명의 형과 남동생도 황당하게 죽었다(형 프리드리히 루트비히는 유아세례때 왕관을 억지로 씌웠다가 생채기로 인한 감염으로 사망, 남동생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대 사열식에서 대포소리를 듣게 해 경기를 일으키다 사망).
즉위
1740년 드디어 바라던데로 아버지가 승하(?) 하게되면서 프리드리히 가족은 난리가 난다.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일에 장례는 형식상으로만 왕세자 신분인 프리드리히만 참석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축하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어쨌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승하하기 전까지 혹독하게 군사를 훈련하고 모으고 근검절약을 실천하며 아들에게 막대한 재정과 군대를 남긴다. 그렇게 프리드리히 왕세자는 프리드리히2세로 즉위하게 된다. 그도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재위기간동안 근검절약과 더불어 군대를 중요시 하게 된다.
베를린으로 와라 다들
1740년 즉위이후 개몽주의에 입각한 개혁에 돌입하게되는데, 다음과 같다.
내용 | |
고문 | 고문 폐지 |
언론 | 언론의 자유 보장 |
종교 | 종교간 차별 금지,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책 |
기타 | 빈민구제, 교육증대 |
거인 연대 폐지 | 이전에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키182cm이상되는 사람만 뽑아 거인 연대를 만들었던 것 폐지 |
아버지가 그렇게 싫어하던 섬세한 기질이 이때부터 나오게 되는데, 원래부터 음악에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플루트 연주는 상당히 수준급으로서 스승으로는 당대의 플루트 대가였던 요한 요하임 크반츠(Johann Joachim Quantz, 1697~1773)이다. 그리고 상수시궁 악장이였던 카를 필리프 에마뉘엘 바흐(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둘째아들, 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가 있었다. 그리고 1747년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를 상수시궁에 초청해 연회를 베풀고 소연주회로 교류한다. 이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프리드리히2세에게 헌정하는 곡이 BWV1079.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1740년 즉위한 후 몇달 안있어 관할영지(프리드리히2세는 소속된 신성로마제국 황제 투표권을 가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수장인 카를6세(Charles VI, 1685~1740, 재위1711~1740)가 승하하면서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Marie-Thérèse d'Autriche, 1717~1780, 재위1740~1780)가 즉위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그틈에 군대를 이끌고 합스부르크령 슐레지엔으로 진격하게 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이 벌어진다.
프리드리히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견제하기위해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7세(Charles VII, 1697~1745, 재위1742~1745)를 지원해 뒤에서 괴롭히게 되지만 1745년 카를7세가 승하하면서 하루빨리 슐레지엔이라도 먹어치우기위해 침공해서 승리한 뒤 마리아 테레지아를 인정해주는 조건으로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의 영토로 인정받는 드레스덴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살리카법을 기반으로 한 신성로마황제직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성인 이유로 승계못하고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프란츠1세, François Ier, 1708~1765, 재위1745~1765)이 신성로마황제로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7년전쟁
더 큰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드레스덴 조약이후 계속해서 슐레지엔을 다시 탈환하기 위한 계획을 짜고있었는데, 프리드리히2세는 이에 그냥 먼저 1756년 선제공격을 감행하면서 유럽의 대전인 7년전쟁(1756~1763)이 발발하게 된다.
1757년 상반기까진 승리를 쟁취해오다가 하반기부터 슬슬 기울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점점 감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는 주변국과 제후들까지 포섭하게 되면서 규모자체가 비교불가한 수준까지 커져버림으로서 1760년엔 베를린이 포위당하기까지 하는 위기상황까지 오게된다. 이때 전쟁의 핵심국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였는데 3명모두 여자 군주가 통치하고있다하여 세여인이 프리드리히를 공격한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
영국의 애매모호한 지원속에서도 뛰어난 용맹술로 승리를 거머쥐면서 유럽내에서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군대가 가면갈수록 약화되면서 무리가 아니갈 수 없었는데, 그마침 천운이 나타나는것이..
1762년 프리드리히2세의 적이였던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sabeth Petrovna, 1709~1762, 재위1741~1762)가 사망하면서 표트르3세(Peter III, 1728~1762, 재위1762)가 프리드리히2세에게 군대를 지원해주고, 적국 스웨덴역시 스웨덴 왕비였던 여동생 루이즈-울리케 드 프로이센(Louise-Ulrique de Prusse, 1720~1782)이 중재를 함에 따라 강화가 체결되면서 길이 열린다.
이에 길이열린 프리드리히2세는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공략하여 최종적으로 프랑스를 몰아내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승리하면서 1763년 조약이 체결되면서 7년전쟁이 프로이센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사실상 이 때 부터 신성로마제국 속국이자 합스부르크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프로이센은 완전히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감자대왕
프리드리히2세는 대왕이라는 별명뿐 아니라 감자대왕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있다. 즉위한지 7년된 1747년에 포메른 기근이 터지면서 식량난이 터져버리면서 이를 어떻게 해결할 지 고민하던 프리드리히2세가 감자를 아이디어로 떠올려 홍보하고 독려하지만 감자는 당시만해도 일반 평민들도 취급하지않는 식물이였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1753년 첫번째 감자칙령(감자 농사에 대한 지식 전달)과 1757년 두번째 감자칙령(감자 가이드 제공하라)을 발표하는데.. 물론 사람들이 잘 알고있는 감자를 귀족들이 먹을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못먹게해서 밤에 몰래 가져가는거 놔둬서 보급하게 했다는 전설도 있다.
어찌저찌 이 덕으로 프로이센 전역에 감자가 보급되면서 감자대왕이라는 별명이 생겨난 것. 현재도 포츠담 궁 내 프리드리히2세의 무덤엔 감자가 있다.
반마키아벨리론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가 저술했던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로서, 피렌체 공화국 서기장(1498~1512)을 역임하면서 썼던 '군주론'은 당시 주군이던 피에르2세 드 메디시스(Pierre II de Médicis, 1472~1503)에게 위대한 군주, 강한군대, 풍부한 재정이 국가를 번영하게 하고 국익을 위해서 군주는 어떠한 수단방법도 가리지 말아야하고 도덕은 필요없라는 내용의 마키아벨리즘을 발표하는데,
프리드리히2세는 이 군주론에 대한 반론으로 1740년 에세이인 반마키아벨리론(Anti-Machiavelli)을 출판하게 된다. 계몽주의에 입각한 전제군주였던만큼 편향된 마키아벨리의 사고를 프리드리히는, 군주가 신하의 건강과 번영을 유지할 책임이 있으며(도덕적), 여기서 나온 문구가 '군주는 국가 제일의 심부름꾼이다' 이다.
승하
나이가 들면들수록 더욱 외골수적인 모습을 보이고 더욱 사람을 불신하게 된다. 74세까지 당시로서는 장수하면서 여전히 예술가들을 후원하는등 이전과 비슷한 활동을 보이는데 1786년 포츠담 상수시궁에서 승하.
1733년 아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폰 브라운슈바이크 볼펜뷔텔베페른(Élisabeth-Christine de Brunswick-Wolfenbüttel-Bevern, 1715~1797)사이에 자식이없어서 후임 군주는 조카인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Frédéric-Guillaume II, 1744~1797, 재위1786~1797)에게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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