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의 군주/프로이센 왕국(1701~1918)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

Mintaka5 2024. 12. 12.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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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 : Frédéric-Guillaume Ier, 독 : Fridedrich Wilhelm I, 1688~1740, 재위1713~1740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688년 신성로마제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선제후국 베를린에서 아버지 프리드리히1세(Frédéric Ier, 1657~1713, 선제후재위1688~1713, 프로이센국왕재위1701~1713)와 어머니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영국 왕 조지1세의 동생, Sophie-Charlotte de Hanovre, 1668~1705)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왕국으로 승격된지 12년만에 즉위한 인물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프로이센 왕국을 특유의 변화와 개혁, 군 증강등으로 국력을 키우고 나라살림을 살찌운 군주이지만, 괴팍하고 폭력적인 성향으로 가족과 국민들을 혹독하게 다룬 군주이기도 하다(폭군이라 하긴 애매함). 부왕 프리드리히1세는 검소하진 않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좋아하는 예술가적 기질이 있던 반면에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는 군인왕이라는 별명답게 자신의 자산을 포함해 모든 체제를 군사력을 키우기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또한 차후 대왕의 칭호를 받는 장남 프리드리히2세(Frédéric II, 1712~1786, 재위1740~1786)는 어머니로부터 섬세하고 예술적인 기질과 교양이 넘치는 모습을 보기싫어해 그야말로 장남을 쥐잡듯이 패고 큰딸 빌헬미네(Wihelmine, 1709~1758)를 포함한 자식들을 패기 일쑤였다. 이런 기행은 17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승하하기전까지 계속 이어진다.

 

군인왕

어릴 떄부터 강한 성격으로 군대에 대한 동경과 함께 군인의 기질을 타고나서 1713년 부왕 프리드리히1세가 승하하게 되면서 개인적인 사치를 부리지 않고, 아버지가 행해오던 호화로운 궁정생활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은 최소한만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군대를 키우는데 썼다. 

어느정도였냐면, 왕궁 정원이 군 연병장으로 바뀌는 정도였으니..  1713년 즉위 당시 프로이센은 막대한 재정적 부채와 함께 약한 왕권이 과제로 남아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는 강한 국력은 군대와 경제력에서부터 나온다는 신념을 굳건히 해 왕인 자신조차 매우 검소하게 살고 왕실비용을 지속적으로 절감하여 그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왕이 이렇게 하는데 아랫사람들이 함부로 사치를 할 수도 없던 노릇이였고, 사실상 국가를 전시체제로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공직에 있는 대신들부터 매우 엄격한 규칙을 담은 칙령을 내려 절대 게으름은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재정을 아껴 군대에 투자한 결과 1730년대 후반엔 8만의 정예군과 전쟁을 치루고도 남을 정도의 든든한 재정이 비축되게 된다. 

 

괴팍한 성격

I. 난 다 팬다

강한 성격으로 인한 난폭함으로 구타를 서슴치 않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는 아내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Sophie-Dorothée de Hanovre, 1687~1757)사이에서 낳은 14명의 자녀들을 두었는데, 그중 우리에게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알려진 왕세자 프리드리히와 장녀 빌헬미네를 상습적으로 구타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그냥.. 다 맞았다고 보면 된다.

첫째 아들 프리드리히(Frédéric, 1707~1708)는 세례식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가 왕관을 억지로 씌우다 머리에 생채기가 나는 바람에 감염으로 사망하고 둘째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Frédéric-Guillaume, 1710~1711)은 강하게 키워야한다는 논리에 의거해 군대 사열식에 1살에 불과한 아들을 데리고가서 대포를 쏴서 대포소리에 경기를 일으키고 죽어버리고 만다. 

 

II. 프리드리히 왕세자

후일 프리드리히2세(Frédéric II, 1712~1786, 재위1740~1786)는 사실상 위의 두 형이 아버지의 이상한 논리로 사망하는 바람에 셋째 아들인 입장에서 왕세자가 될 수 있었는데, 아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자식들중 가장 많이 맞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는데 1730년 프리드리히 왕세자의 애인 한스 헤르만 폰 카테(Hans Hermann von Katte, 1704~1730)와 탈출하려다 붙잡혀 같이 투옥되었다가 카테가 참수당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는 프리드리히 왕세자에게 본보기로 카테의 수급을 왕세자가 보는 앞에 둬서 왕세자가 기절해버려 아예 죽여버리겠다고 덤벼듬에 신성로마황제 카를6세(Charles VI, 1685~1740, 재위1711~1740)까지 나서서 막은 덕분에 살아서 이후 아버지를 이어 즉위할 수 있게 된 것.

 

사망

1740년 52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잦은 음주와 기름진 음식을 매일 섭취한 탓에 비만으로 온 합병증 때문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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