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208대 영의정 채제공

Mintaka5 2025. 3. 5.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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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1720~1799, 영의정재임1793.07~1793.07(총9일 재임)

채제공,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720년(숙종46년) 조선 충청도 홍주목(현재 충남 홍성군 홍성읍)에서 아버지 채응일(1686~1764)과 어머니 연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조선 후기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시기 영의정을 역임한 문신으로, 1735년(영조11년) 향시 급제, 1743년(영조19년)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면서 관리가 된다.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의 재위기간 52년간에 걸쳐 다양한 요직들을 두루 거치면서 승진을 거듭하는데, 1760년대 들어 영조와 사도세자(1735~1762)간의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세자폐위의 그림자가 짙어질 때 채제공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막아 철회시켜 사도세자를 살려낸다. 

1762년(영조38년)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하기 전 모친상으로 물러나있었고, 모친3년상이 끝나자마자 1765년(영조41년) 부친상으로 다시 3년상을 치른 뒤 1767년(영조43년) 다시 관직에 복귀한다. 이 이후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1770년엔 정2품 판서를 역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780년(정조4년) 측근이던 홍국영(1748~1781)이 무너지고 새로운 계열이 등장하면서 채제공도 홍국영과의 연관성 때문에 대간들의 공격을 받아 1788년까지 은거생활을 하고 이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오른다.

 

 

초년

1735년(영조11년) 향시에 급제하여 1743년(영조19년)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종9품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1748년(영조24년)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의 탕평책을 표방했다는 특명을 받아 당시 청요직이였던 예문관 검열직을 제수받게되면서 출세가도의 길이 열리지만, 1751년(영조27년) 어떤 한 중인의 분산(무덤 묘역)을 탈취한 죄로 강원도 삼척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관직생활 

이후 풀려나 1753년(영조29년) 호서(충청도)암행어사에 임명되는데, 모두 돌아보고 복귀해 균역세법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폐단을 획척해 이를 보완하고, 1755년 동부승지, 1758년(영조34년) 대사간, 좌승지, 도승지등을 역임하며 정3품 상계 당상관의 반열에 이르게 된다. 이 때 채제공은 영조와 사도세자(1735~1762)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되면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세자에서 폐위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그는 목숨을 걸고 폐위명령을 철회시키면서 도리어 영조와 당시 세손(미래의 정조)에게 신임을 얻게 된다. 

그러다 1762년(영조38년) 채제공의 어머니 연안 이씨가 사망하여 모친상3년을 치르러 가자마자 임오화변(1762)이 터져 그토록 지키려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아사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그럴 새도 없이 채제공은 3년상을 치르고 관직에 복귀하자마자 1765년(영조41년) 아버지 채응일(1686~1765)까지 사망하게 되면서 다시 3년상을 치르게 된다. 상을 다 치르고 1767년이 되어서야 다시 관직에 나아가게 되어 1770년(영조46년) 정2품 판서에 이르게 된다. 

 

 

왕세손 이산

세손(미래의 정조, 1752~1800, 재위1776~1800)은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만10세 때 임오화변으로 아버지를 잃은 뒤 세손이 되지만 당시 어머니인 세자빈 홍씨(혜경궁 홍씨, 1735~1816)의 당색이였던 노론을 대리청정을 하면서 별 신경쓰지않고 오히려 소론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가 사망했는데, 이후 노론, 소론 할 거 없이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몰려 죽었으니 세손도 그 죄가 없을 수 없다하여 위협을 받는 상황에 영조는 1764년(영조40년) 세손을 이미 요절한 아들 효장세자(1719~1728)의 양자로 입적시켜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함과 동시에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 2명의 중신들에게 세손을 부탁하는데 그 두사람이 채제공과 김종수(1728~1799)이다. 이후에 세자시강원으로 들어오는 홍국영(1748~1781)과도 친해지게 되면서 측근이 되게 된다. 

김종수는 세손의 학문적 스승역할을 하면서 세손에게 통치자의 덕목을키우게 가르친다. 비록 채제공과 김종수는 당색이 달라(김종수는 노론, 채제공은 남인) 반목하는 사이였지만 세손의 보호만큼은 같은 뜻을 가져 서로 긴밀히 협력하여 세손을 끝까지 보호하게 된다. 

 

정조의 즉위와 홍국영

1776년 영조가 승하하고 세손 이산이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로 즉위하게 된다. 채제공은 국장도감(조선역대왕과 왕비의 무덤관리)제조가 되고 형조판서에 제수되어 세손을 모함하고 사도세자를 공격했던 대신들을 척결하는데 앞장서고 이를 다 마무리 짓고난 다음 사도세자의 복권을 주장하지만 반대파였던 김종수(1728~1799)의 반대로 무산되게 된다.   

그리고 홍국영은 정조 즉위와 동시에 도승지(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장)가 되어 도성의 호위를담당하는 임무를 채제공과 함께 도맡아서 하게된다. 그러나 1779년(정조3년) 원빈 홍씨(1766~1779)가 정조의 후궁이되면서 왕실의 외척이자 세도가가 된 홍국영과 마찰을 빚게되면서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지만 홍국영이 1780년 실각하게 되면서 복직되나, 1781년 반대파인 소론 서명선(1728~1791)이 영의정이 되면서 집권하게 되자 이전의 사도세자 신원 복권에 대한 강한 주장과 더불어 홍국영과의 친분등을 내세우는 노론, 소론측 대신들의 공격을 받아 벼슬을 버리고 8년간(1781~1788) 수도 한양근교에서 은거생활을 하게 된다.   

 

말년

1788년 정조의 명으로 정1품 우의정에, 1790년 좌의정이되는데 영의정 김익(1723~1790)이후로 3년간(1790~1793) 영의정과 우의정이 공석이되는 독상체제가 지속되면서 사실상 좌의정 채제공이 행정을 수반하게 되면서 정사를 이끌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때 이조전랑의 자대제(후임 추천권)박탈하고 금난전권(한양에서 정해진 시전 상인 이외엔 상업활동을 금지하는 법)을 박탈하는 '신해통공'을 설치하여 시전 상인의 독점권을 폐지하고 소상인들의 상업 활동을 보장하게 한다. 일종의 정경유착을 끊어내는 개혁적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791년 진산사건(신해박해)가 터지면서 서학(카톨릭)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792년 다시 좌의정으로 복직 후 1793년 영의정이 된다. 영의정은 9일간 재임하지만 곧바로 화성부유수로 전출된다. 이는 1794년부터 착공이 시작된 수원 화성 건립으로 인해 채제공이 그곳의 책임자가 되었기 때문. 채제공은 당시 발명왕이자 실학자 정약용(1762~1836)과 함께 축조를 담당하게 된다.

1799년 노환으로 만79세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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