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정약용

Mintaka5 2025. 3. 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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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1762~1836

정약용,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762년(영조38년) 조선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정재원(1730~1792)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태어남. 호는 다산.

 

배경

명실상부 다재다능의 끝판왕. 어릴적부터 학문에 관심이 많아 아버지 정재원을 따라 다니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성호 이익(1681~1763)의 학문을 계승하여 실학 사상의 근간을 갖추게 된다.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와의 기가막힌 콤비로 유명하다. 부교(배다리)를 생각해내어 사도세자(1735~1762)의 묘인 영우원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성공적으로 옮기게 하고, 수원 화성 건립때 총 공사기간을 단축시킨 거중기를개발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천주교와 연관되어있던 집안배경과 정순왕후(1745~1805)의 수렴청정으로 인하여 18년간의 유배와 이후에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저술활동에만 몰두하고 1836년(헌종2년) 만74세로 사망한다. 500여권에 달하는 서적을 집필하였고 대표적인 저술서로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등이 있다. 

 

 

초년

정약용이 태어난 1762년(영조38년)에 일어난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1735~1762)가 뒤주에 갇혀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당시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1730~1792)은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여 영조의 인정을 받아 이조에 소속되어 벼슬생활을 하다가 임오화변을 직접 목격하고 모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임오화변 직후 태어난 아들 정약용의 아호를 귀농이라 지을 정도로 당시 당쟁을 매우 경계하는 의미에서 지은 아호라 생각이 든다. 

정약용은 아버지 정재원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스스로 독학하는 형태로 수양을 했다. 어릴적부터 학문을 좋아해 서적들이 쌓여있었고 1770년(영조46년) 어머니 해남 윤씨가 사망하면서 계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다가 아버지 정재원이 생활고로 인하여 음서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서 1776년(영조52년) 호조 좌랑에 임명되면서 수도 한양으로 가서 셋방(?)살이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 때 정약용은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스승이 되는 이가환(이승훈의삼촌, 1742~1801)과 매부 이승훈(1756~1801)을 만나게 된다. 이가환과 이승훈은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때 실학자인 성호 이익(1681~1763)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들로서 정약용도 이를 따라 이익의 학풍을 그대로 학습하게 되며 실학사상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 

1780년(정조4년) 아버지 정재원이 예천군수로 부임해가게 되면서 정약용도 한양 셋방(?)살이를 정리하고 아버지를 따라 예천으로 내려갔다가 과거시험 준비로 혼자 한양으로 올라와서 다시 셋방으로 들어가 과거시험준비를 하다가 1783년(정조7년)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1782~1786)의 세자 책봉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열린 증광시에 합격해서 생원이되고, 이듬해 1784년엔 진사시에도 합격해서 성균관에 들어간다. 성균관에서 매달 치르는 시험과 불시에 치르는 시험에서 모두 높은 성적을 차지해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의 눈에 띄게 된다.

 

관직

1789년(정조13년) 대과에 해당하는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해서 관직(희릉직장)에 진출하게 되는데 이미 정조의 눈에 띄어서 규장각에 학사로 배치를 받아 연구와 학문증진시킨다. 당해에 정조는 정약용을 통해 부교(배다리)를 제작하게끔 하는데, 정조는 당시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묘가 있는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자 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는데 하나의 문제는 한강을 도하해야 수원 화산으로 갈 수 있었는데 정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약용에게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한다. 

정약용은 여러차례 고심끝에 부교(배다리)를 생각해내기에 이르는데, 이는 배들을 가로로 일렬로 배열시킨 뒤 나무판자로 쭉 연결시킨 다음 도하를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였다. 도하지점은 한강의 폭이 가장 좁고 상대적으로 유속이 느린 노량진쪽으로 선정되어 부교를 놓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성공적으로 이전하기에 이른다. 정조는 수원 화산에 영우원(사도세자의 묘)을 이전시킨 다음 현륭원으로 개칭한다. 

 

신해박해(진산사건)

1791년(정조15년) 신해박해가 일어난다. 조선에서 최초로 일어난 천주교 탄압인데 전라도 진산군에서 일어났다고 하여 진산사건이라고도 불리는데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1759~1791)이 유교적 제사방식을 치르지 않고 천주교적 제사방식으로 어머니 제사를 치르고 조상들의 신주단지까지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는 성리학의 근간으로 세워진 조선에서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하여 조정이 발칵 뒤집혀진다.  윤지충이 남인이였기에 이 사건은 당쟁으로 번지게 되는데 이로 인해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게 되는 요인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남인에서도 천주교를 탄압해야 한다는 공서파와 천주교를 묵인시켜야 한다는 신서파로 갈라지면서 원래부터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탄압을 주장해온 노론 벽파와 공서파쪽에 힘을 실어준 정조에 의해 윤지충은 권상연(1751~1791)과 함께 참수형을 당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진산군은 군에서 현으로 강등된다. 

 정약용은 이 신해박해때 자신도 천주교 집안이라는 이유로 공서파의 모함을 받아 유배형을 받게되지만 보름정도만에 풀려나고 복귀하게 된다. 

 

 

수원 화성

1791년 신해박해가 마무리되고 정약용도 유배에 풀려나고 본격적으로 정조가 시행하려던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는데, 공사기간을 줄이기 위한 대안으로 거중기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테스트까지 마치고 정조에게 극찬을 받던시점에 아버지 정재원(1730~1792)이 사망하게 되면서 3년상을 치르게 된다. 1794년부터 시작된 수원 화성 공사에서 거중기는 그 효력을발휘하게 되면서 성벽을 쌓는데 상당한 효율성을 보이게 되면서 2년반만인 1796년(정조20년)수원 화성이 완공되게 된다.

 

정조 승하 이후

1800년,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가 갑자기 승하한다. 정약용은 당시 낙향하여 고향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급하게 온다. 정조 승하 이후 즉위한 순조(1790~1834, 재위1800~1834)는 만10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던 정순왕후 김씨(1745~1805)가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되면서 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I. 신유박해

1801년(순조1년) 정순왕후는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게 된다. 노론 벽파 세력이였던 정순왕후는 정조의 즉위기간(1776~1800)동안 정조에 의해 집안이 몰락하고 노론 벽파가 힘을 쓰지 못했던 시기를 거치고 권력을 잡아버린 것이다. 천주교를 크게 경계하지 않고 나름 묵인했던 정조와 남인들을 이기회에 쓸어버리고자 한 것.      

정약용도 노론 벽파측에서 제거해야할 대상에 올라있었는데, 마침 형인 정약종()이 천주학 서적을 숨기려다 적발되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외에도 매형 이승훈, 스승 이가환등도 체포된다. 정약용은 1791년 신해박해(진산사건)때 천주교를 버렸다고 하지만 당시 직접 연관되어 처형당했던 윤지충이 정약용의 외사촌 형이였다는 것에 정약용도 체포되고 유배형을 받게 된다. 

 

II. 유배

그렇게 정약용은 유배를 떠나게 되는데, 짧지 않은 기간인 18년간의 유배생활을 겪게 된다. 이 시기동안 500여권에 달하는 수많은 서적을 저술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잘 알려져있는 경세유표(제도 법규에 관한), 목민심서(지방 관리의 몸과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서), 흠흠신서(조사, 심리, 처형업무를 하는관리들의 계몽을 위한 서적) 등이 있다. 18년간의 유배가 끝난 1818년(순조18년) 해배(유배해제)를 명 받게 되면서 다시 관직에 오르지만 3달만에 다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III. 최후

1818년(순조18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저술활동에 여생을 보내고 1836년(헌종2년) 만74세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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