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탕개의 난, 1583
배경
1583년 1월, 조선 동북방 여진 경계지역인 6진(온성,종성,회령,경원,경흥,부령)중 회령 지방에서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즉위 초기때 조선으로 귀화한 여진인니탕개(?~1583)라는 야인여진 인물이 난을 일으킨다. 이미 150년전 세종(1397~1450, 재위1418~1450)시기부터 6진지역 방어에 만전을 기하던 조선은 1467년(세조12년) 이시애의 난, 중종(1488~1544, 재위1506~1544)시기 여진과의 조공 관계도 단절되면서 사실상 조선과 여진의 단절이 이어진다.
그러다 1500년대 후반 건주여진출신의 지도자 누르하치(1559~1626, 건주여진추장재위1583~1616, 후금재위1616~1626)가 여진족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여러 여진족들중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던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들이 흉년으로 인한 식량부족과 내부 세력다툼등을 이유로 조선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1차 침입(경원진)
니탕개는 야인세력을 결집시켜 3만여명이라는 대병력을 가지게 되는데, 1583년 1월 28일, 우선적으로 1만여명의 여진병력을 이끌고 경원진을 공격하면서 난이 시작된다. 소수의 수비병력을 가졌던 경원진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성전을 펼칠 수 밖에 없던 입장이라 일단은 버텨보자는 주의로 전념했다.
당시 경원진 부사 김수(1547~1615)는 최선을 다해서 경원진을 막고자 각 성문마다 병력을 배치해 방어에 주력했지만 서문을 맡던 만호 이봉수(?~?)가 여진의 병력을 보고 도망쳐서 이곳이 뚫림과 동시에 경원진이 약탈당하기에 이르는데 무기고, 식량창고까지는 필사적으로 막아 약탈당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수적 열세는 상당히 커서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인 상태에서 신립(1546~1592)이 합세해 협공하게 되면서 니탕개 군을 상대로 승리하게 된다.
조선에서는 이 사건이 있고난 이후 경계를 강화하고 비정기적 무과 시험을 치루어 무관을 선발하여 방비를 함에있어 틈이 없게끔 방비를 하게 된다.
2차 침입(종성진)
1차 침입이끝난지 3개월정도가 지난 1583년 5월 초, 니탕개(?~1583)는 다시 병력을 결집시켜 이번엔 종성진을 공격하게 된다. 두만강 하류 일대였던 종성진은 조선 최북단 경계지역이였고 함경평야를 지척에 두고있던 6진(온성,종성,회령,경언,경흥,부령)중 가장 중요한 요지였던 탓에 여진이 이를 교두보로 삼고자 이곳을 공격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군과 니탕개군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며 필사의 방어와 공격을 하고 있었는데, 1차 침입이후 니탕개와 사이가 좋지않던 여진세력이 조선에 가담하면서 세가 기울게 되면서 니탕개군은 후퇴를 하게 된다.
그렇게 이후로도 병력을 결집시켜 재차 공격을 가하지만 만족할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한 채 패배를 지속하게 되는데, 니탕개는 연속된 패배로 조선에 협상을 요청하지만 조선측에선 니탕개를 신뢰할 수 없다며 협상을 결렬시키고 다시 니탕개가 2만여명의 병력을 가지고 7월 방원보를 공격한다. 결과는 대패였고 방원보라는 천혜의요새를 공격한 니탕개군은 사실상 군이 와해되면서 사실상 니탕개의난은 종료된다.
난 이후
니탕개의 난이 끝나고 이후에도 여진의 노략질은 계속 이어지는데, 1588년(선조21년)이후로 잠잠해지지만.. 4년뒤 더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