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5품 교리
배경
조선시대 최초의 교리 직위는 1399년(정종1년)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5품 이하의 문신이 교리를 겸직하게 되면서 역사가 시작되는데, 이후 1401년(태종1년)교서감을 교서관으로 개편하면서 교서관 교리직이 설치되고, 1409년(태종9년) 승문원 교리가 설치, 세종(1397~1450, 재위1418~1450)대인 1420년(세종2년) 유명무실했던 집현전을 재건하면서 정5품 관리를 교리로 임명하게 된다. 홍문관의 모태가되는 집현전이 그 시초이였는데 그러나 1456년(세조1년) 집현전의 관리들이 단종 복위 운동명목으로 세조를 제거하려 모반을 꾀했다가 모두 숙청당하고 세조는 집현전을 폐지해버린다.
1463년(세조8년)집현전을 계승했던 홍문관이 설치되고 예문관 관원이 교리직을 대행하다가 1478년(성종9년)홍문관 관원이 교리로 편제되기에 이른다.
요직
교리직 중간품계인 정5품, 종5품 관직으로서 어떤 기관에 속해있든 중요한 관직으로서 다른 기관 겸직이 가능했고(예문관 정4품 응교 겸직 가능) 서책, 실록 편찬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특히 교리중 홍문관 교리는 청요직중 하나로서 정승이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직중의 요직이였다.
각 부서별 교리
I. 교서관 교리(종5품)
1401년(태종1년) 책을 편찬하고 관리하고 제사를 관장하던 교서감이 교서관으로 개칭된다. 교서관을 구성하던 관리들은 모두 문관이였고 교서관 교리는 종5품 관리로서 정원은 1인이였다. 위로 제조, 부제조, 판교등의 직위가 있었지만 모두 타관이 겸하였기에 사실상 교서관의 책임자는 교리였다.
II. 승문원 교리(종5품)
1409년(태종9년) 고려시대때 외교문서 작성기관인 문서응봉사가 승문원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개편, 강화된다. 승문원은 고려시대 문서응봉사와 같이 외교문서 작성과 더불어 검토를 했던 기관으로 승문원 교리의 품계는 종5품으로 하였고 정원은 2인으로 운영되었으나, 중종(1488~1544, 재위1506~1544)대에 교리직이 혁파된다.
III. 집현전 교리(정5품)
1399년(정종1년)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강론과 연구를 담당하는 기관하게끔 하고 정5품 교리직을 설치하고 정원을1인으로 하였다. 설치이후20년간 별 활동이 없던 집현전이 1420년(세종2년) 세종(1397~1450, 재위1418~1450)이 집현전을 재건하여 정5품 교리의 정원을 1인에서 2인으로 증원하고 국왕의 자문까지 하게되며 기능이 강화된다.
그러나 1456년(세조1년), 세조(1417~1468, 재위1455~1468)가 조카인 단종(1441~1457, 재위1452~1455)의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분노가 단종 복위 운동이라는 움직임으로 집현전 관리를 중심으로 한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이 세조를 암살할 음모를 계획하다가 김질(1422~1478)이 장인 정창손에게 밀고하고 이에 정창손이 고변하여 계획이 발각됨에 따라 이들은 추국을 당하고 모두 숙청당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세조는 집현전을 폐지하기에 이르고 집현전이 보유했던 서고를 예문관에서 관리하게끔 한다.
IV. 홍문관 교리(정5품)
1463년(세조8년) 집현전이 폐지된지 7년이 된 해, 세조는 문서 보관 기관을 신설하는데 이 기관이 홍문관이다. 그러나 저땐 장서기관(문서 보관)으로서의 기능밖에 하지 못하다가 이후 정식으로 개편되어 언론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로서 학술, 언론 기능이 본격화 되는 시기는 1478년(성종9년)이다. 이 때 정5품 교리직이 설치되며 정원2인으로 구성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