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조선6대 단종(1441~1457, 재위1452~1455)의 복위를 도모하려다 발각되어 단종에 대한 충절을 다하다가 거열형을 당한 6명의 신하.
배경
조선 초기 1456년(세조1년), 삼촌인 세조에 의해 1455년 폐위되어 상왕이 된 단종(1441~1457, 재위1452~1455)을 복위하려고 주도적으로 움직였던 6명의 신하(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들을 말한다. 이들중 대부분은 집현전 출신의 문신들이였는데, 세조(1417~1468, 재위1455~1468)를 제거하고 상왕이 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자 연회에 참석하려는 세조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 모의가 발각되어 붙잡혀 심문을 당한 박팽년(1417~1456)으로부터 증거가 드러나게 된다. 우찬성 정창손(1402~1487)의 사위인 김질(1422~1478)역시 단종복위운동에 연관이 되어있었는데 이를 장인에게 고발하여 모의가 발각된 것이다.
세조는 주모자6인에 대해서 거열형을, 친자식들에겐 교형을, 어미와 딸, 첩, 형제자매, 아들의첩등을 노비로 영구배속 시키고 백부와숙부의 자식들은 먼 지방의 노비로 영구배속하라고 명을 내리게 된다. 박팽년은 심문중 사망하고, 체포되기 전에 자살한 유성원과 사육신은 아니지만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허조(?~1456)에 대해서도 시체를 거열한 후 목을 잘라 효수한다.
본관 | 생몰년도 | 비고 | |
성삼문 | 창녕 | 1418 ~ 1456 | 사간원 우사간, 성승의 아들 |
박팽년 | 순천 | 1417 ~ 1456 | 형조참판 |
이개 | 한산 | 1417 ~ 1456 | 직제학 |
하위지 | 진주 | 1412 ~ 1456 | 예조판서 |
유성원 | 문화 | ? ~ 1456 | 직집현전 |
유응부 | 천녕 | ? ~ 1456 | 동지중추원사 |
계유정난
야심에 가득차있던 수양대군(세조, 1417~1468, 재위1455~1468)은 1452년 형 문종(1414~1452, 재위1450~1452)이 승하하자마자 조카 단종(1441~1457, 재위1452~1455)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 첫 시발점이 되었던 사건이 계유정난(1453)이다. 당시 어린 단종이 즉위하고 섭정을 할 수 있던 왕실어른이 한명도 없었기에 이를 걱정했던 문종이 고명대신으로서 영의정 황보인(1387~1453), 좌의정 남지(?~1453), 우의정 김종서(1383~1453)를 하여금 단종을 보필게끔 해놓긴 하는데, 이들도 계유정난때 화를 입게되면서 사실상 단종의 측근이 사라지고 수양대군이 영의정이 되어 사실상 국정을 2년간 손에 쥐고 1455년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자신이 왕위에 오르고 단종을 상왕으로 몰아낸다.
고변
이러한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개한 사육신6인을 포함한 문무댇신들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서로 결의하는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를 기회삼아 세조를 포함한 측근들을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로 계획한 사실이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던 김질(1422~1478)이 장인인 정창손(1402~1487)에게 일러바치면서 이를 고변하기에 이른다. 이외에도 신숙주, 정인지등이 사육신의 편에 서있다가 세조의 편으로 전향하여 배신자가 된다.
단종복위운동에 분개한 세조는 이들을 직접 국문하게 되면서 사육신중 박팽년은 옥사하고 유성원은 자신의 집에서 자결하기에 이른다. 하위지는 죄를 시인한다면 살려준다고 세조가 말했지만 이를 사양하고 덤덤하게 죽음을 택하게 된다. 그렇게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등은 거열형에 처해졌고, 이미 죽은 박팽년과 유성원의 시체역시 거열형을 당하고,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자들 수십명도 처벌되기에 이른다.
이후
중종반정(1506)이후 사육신을 충신으로 평정하기를 건의하는 상소가 나오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적으로 오르게 된다. 이후 경연등에서 사육신의 충절을 거론하는 형태로 나오고 더 이후인 1691년(숙종17년) 사육신을 정식으로 국가에서 복관하고 제사지내게끔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