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기구/조선

비융사

Mintaka5 2025. 1. 21.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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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융사, 1500~1504

조선10대 임금 연산군(1476~1506, 재위1494~1506)4년인 1500년, 철제 전투용품을 생산하기위해 설치된 특별임시관서.

 

 

배경

조선 중기로 넘어갈 시점인 1500년(연산군6년), 갓 영의정에 등극한 훈구파 한치형(1434~1502, 영의정재임1500~1502)이 건의해 창설된 군수품을 제조(철갑옷, 투구등)하는 특별기관인 비융사가 설치되게 된다. 당시 군사들은 가죽으로 만든 갑옷과 투구 거기다 모자라 종이로 만든 갑옷등을 입어 전투에 임하는등 방어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이에 한치형이 비융사 설치를 건의하여 철제 갑옷과 투구를 제조하여 군사들에게 면포를 내고 구입해 입도록 하게 한다. 그러나, 연산군(1476~1506, 재위1494~1506)과의 갈등과 연산군의 폭정에 말을 얹다가 1502년 영의정 재직중 사망하고 2년뒤 1504년(연산군10년)에 발생한 갑자사화로 인하여 한치형의 죄가 추가되어 부관참시되고 일족들이몰살당하고 연산군의 왕명에 의해 비융사가 혁파되기에 이른다.  

 

설치

1494년, 조선9대 임금 성종(1457~1494, 재위1469~1494)이 승하하고 재위에 오른 연산군(1476~1506, 재위1494~1506)은 성종의 치세를 그대로 이어가고 성종 말기 만연한 부패를 근절하기위해 나름 관리들의 기강을잡고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북쪽변경지역 여진족의 침입이 더욱 잦아지면서 병사들의 방어구가 부실하다는 점과 열악한 병영환경등을 개선하고 여진족으로부터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당시 영의정 한치형(1434~1502, 영의정재임1500~1502)이 비융사 설치를 건의한다. 이 비융사에서 기존 병사들이 입던 갑주의 재질이 가죽또는 종이로서 상당히 빈약한 방어력을 가졌다가 철제로 갑옷과 투구, 무기등을제조하면서 전체적인 병사들의 전투력 상승을 꾀하였다.     

그러나 비융사 설치 후 대간들의 반대가 이어진다. 전투용 갑옷, 투구, 무기등을 만들기위해 별도의 관서를 설치한다는것이 전례가 없던 일이고 병조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것 이라는 상소를 올리지만 연산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유지된다.  

 

조직

그렇게 영의정 한치형의 건의로 연산군이 이를 윤허하게 되면서 비융사가 본격적으로 설치된다. 초대 비융사 제조로서 연산군에게 설치건의를 올렸던 영의정 한치형과 병조판서 이계동(1450~1506)을 삼고, 4명의 정5품에 해당하는 별좌를 임명하여 운영하게끔 한다. 비융사가 설치되고 병사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갑옷, 투구, 무기등의 제작량이 늘어남에 따라 면포를통해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게끔 시스템을 살짝 바꾼다.   

 

갑자사화

그러나 1504년(연산군10년), 1498년에 벌어진 무오사화와는 비교가안될만한 사건인 갑자사화가 일어난다.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1455~1482)를 폐출시킨 모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윤필상(1427~1504), 한명회(1415~1487), 비융사에 직접 연관된 한치형등이 부관참시되고 동시에 한치형이 올렸던 모든 문서, 법등이 폐지되고 일가가 몰살되게 된다. 

그렇게 한치형이 건의했던 비융사역시 연산군의 왕명에 의해 1504년 9월 혁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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