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용, 1870~1928
출생
1870년 조선 경기도 광주부 궁촌에서 아버지 광흥령 이희하(1839~1900)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남. 아명은 이용구. 이재긍(1857~1881)의 양자가 되면서 이은용으로 바꾸고, 1900년 고종이 3남 영친왕의 이름을 이은(1897~1970)으로 지으면서 겹치지 않기 위해 이지용으로 재개명.
배경
친일파로서 이완용보다 덜 알려진 인물이지만 이완용보다 더한 인물중 하나. 심지어는 조선 왕조 전주 이씨 왕족출신으로서 광평대군(세종의 5남, 1425~1445)의 17대손. 문과 급제이후 고종의 명으로 일본 본토를 돌면서 탐방후 감찰사를 거쳐 주일 대사등을 지내고 1900년대에 들어서 친일적 행각을 슬슬 드러내면서 1905년 을사늑약에 동조하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된다. 1928년 사망.
가계
조선 왕족 출신으로서 조선4대 세종(1397~1450, 재위1418~1450)의 5남인 광평대군(1425~1445)의 17대손이자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의 5촌 조카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1887년(고종23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시강원 문학, 이조정랑, 형조참의등을 거쳐 목사, 군수등을 지낸다. 이후 일본에 파견되어 유람단으로 수개월간 파견임무를 마치고 돌아온다.
친일의 시작
1901년(광무4년, 고종37년) 정3품 상계 당상관으로 승진하고 제조겸 총재를, 1902년 법부대신의 공석으로 임시서리가 되고 1903년 일제 특명전권공사로 특명을 받으면서 친일행각이 시작된다. 이 때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1860~1939)의 한일밀약에 동조하고 외부대신서리에 올랐을 때 한일의정서(러일전쟁당시 중립을 주장했던 대한제국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대한제국 황궁을 점령하고 강제로 체결한 조약)를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현재가치 약 50억원가량)을 받고 협조,조인하는 행위를 보이고 보빙사로서도 특파되고 이후 여러 관직을 얻으면서 승승장구 한다.
1905년(광무8년, 고종41년)11월, 내부대신으로 있던 이지용은 을사늑약 체결을 본인을 포함한 5인으로서 체결을 주도함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들 5명을 을사오적(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이라고 부른다. 당시에 조선통감부의 정책에 동조하고 친일협력단체를 만들고 친일활동단체에 속하면서 활동하게 된다.
이후로도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간접자본투자로 도로, 철도, 항만등의 국가 기반시설을 만들어 사실상 대한제국의 경제 활동을 원할하게 하여 일제의 수탈에 유리해지도록 하는 사업에 적극 동참하게 되면서 더욱 국가침탈을 가속화하게 된다.
경술국치 이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되면서 식민지가 됨에 따라 이지용은 이전의 공로들을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조선귀족(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면서 매년 1600원(현재기준 약 8천만원~1억사이)에 달하는 수당을 받았다. 이 뿐만아니라 공채금 10만원(현재기준 50억원)을 받는등 당시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금액을 받고는 도박에 빠지면서 도박죄로 검거되면서 처벌되면서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되고 가지고있던 백작 작위도 취소된다만 1915년 다시 특사로 작위를 회복한다.
이후로도 고문직, 사장직, 조선귀족회 이사직등을 연임하고 1925년 다시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고 이전보다 더 오른 매년3000원(현재기준 1억5천만원 가량)을 죽을 때 까지 받고 1928년 사망한다. 사망 후 백작 작위는 양손주인 이영주(1918~1955)가 습작하게 된다.
친일파708인명단, 친일인명사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모두 오른 친일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