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택, 1865~1919
출생
1865년 조선 충청도 충주(현 충북 충주시)에서 아버지 이민승(1841~1912)과 미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을사오적(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중 한명으로 친일파. 형 이근호(1860~1923)와 동생 이근상(1874~1920)역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귀족 작위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직을 제수받으며 죽을때까지 일제로부터 연금을 받으면서 가족들과 호화스럽게 생활하다가 1919년 사망. 아래표는 을사오적 목록.
생몰년도 | 직위 | |
이완용 | 1858 ~ 1926 | 학부대신 |
이근택 | 1865 ~ 1919 | 군부대신 |
이지용 | 1870 ~ 1928 | 내부대신 |
박제순 | 1858 ~ 1916 | 외부대신 |
권중현 | 1854 ~ 1934 | 농상공부대신 |
관직으로
1882년(고종18년) 발생한 임오군란 때 충청도 충주로 피신했던 명성황후(민비, 1851~1895)에게 생선을 진상함으로서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유명한 인물로 명성황후가 궁으로 다시 환궁하면서 이근택도 따라가게되면서 벼슬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1884년(고종20년)무과에 급제하여 정식으로 관직에 입문하게 되면서 부사, 목사, 절도사, 병조참판등을 역임하지만 1897년(고종33년)1월 왕실 친위연대 3대대장으로 복무하던 당시 조선 정복 음모를 꾀하다가 귀양을 가서 9개월만에 풀려난다.
이후에도 독립협회 해산에 대한 공로로 더 높은 관직을 제수받게 되면서 1901년 경부대신 서리, 헌병사령관, 육군부장, 군부대신, 원수부 회계국 총장등에 오른다.
을사오적
원수부 회계국 총장에 오른 1903년(광무6년, 고종39년),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1860~1939)가 추진했던 밀약인 한일의정서(러일전쟁당시 중립을 주장했던 대한제국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대한제국 황궁을 점령하고 강제로 체결한 조약) 체결에 동조하여 11월에 1만엔(현재가치 약50억원)을 받고 내부대신 이지용(1870~1928)이 하야시 곤스케와 한일의정서를 강제체결하는 결과를 낳게 만든다. 그렇게 더욱 급속도로 승진하여 농상공부대신, 법부대신, 군부대신등 한해가 되지않는동안 고위직을 거치고 1905년(광무8년, 고종41년) 군부대신에 재직중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등과 함께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함으로서 [을사오적]으로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팔아넘긴다.
경술국치 이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수여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매년 1600원(현재가치 약 8천만원~1억원)에 해당하는 수당을 받고 그와중에도 공채금 수만원을 받는등 일제에 협력한 대가를 받음과 동시에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행각에 뜻을 보태는 형태로 친일행각을 이어가게 된다. 이러한 행태로 이근택의 가족들은 일제강점기(1910~1945) 36년간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친일행각을 이어나가다가 191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