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이완용

Mintaka5 2025. 1. 2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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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1858~1926

이완용,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58년 조선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에서 아버지 이호석(1822~1888)과 어머니 영산 신씨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매국노, 친일반민족행위자, 일제부역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로 친일파의 상징적 인물이다. 1882년(고종18년)증광별시 병과로 급제해 관직을 거치면서 영어, 신학문등을 배우고 외교쪽으로 재능을 보이면서 관직을 맡으면서 동시에 외교관으로서의 임무를 맡아 공사직을 맡기도 하는 개화파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다. 

이때까지만해도 이완용은 친미파에 가까운 인물이였는데, 1894년(고종30년) 청일전쟁으로 일제가 승기를 잡으면서 친청파가 몰락하면서 친일개화파가 득세하지만 자신의 상관이였던 박정양(1842~1905)이 1895년 내각총리대신이 되면서 이완용도 중책을 맡게 된다. 그러나 아관파천(1896~1897)이후 러시아 제국의 내정간섭이 이어지면서 반러입장을 취하지만 좌천된다. 

그러나 이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본격적으로 내정간섭을 하면서 친미파에서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다. 당해 11월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고 이후 1907년 정미7조약, 1910년 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등 대한제국을 사실상 팔아넘기는데 일조한 대표적 인물이 되면서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9적등의 3관왕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행위로 1909년 12월 지사 이재명(1887~1910)의 칼을 맞고 중상을 입지만 살아남는다. 경술국치 이후 귀족으로서 일제에 의해 대우를 받으면서 친일행각에 앞장선다. 1926년 사망. 

 

친미

1882년(고종18년)증광별시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게 된다. 1887년(고종23년)엔 육영공원에 입학해 근대화된 교육과 함께 영어를 교육받게 되면서 조선 최초 주미 공사단에 발탁되어 일하게 된다. 이 공사관에서 전권공사 박정양(1842~1905)과 인연이되어 주미공사관에서 일하면서 미국에도 상당기간 체류하면서 미국 특유의 사상과 문명의발달, 제국주의 열강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국력의 논리를 파악하게 된다. 이러한 행보로 이완용은 친미파로서 알려지게 된다.  

1894년(고종30년)청일전쟁으로 승기를 잡은 일제가 이듬해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일으켜 더욱 영향력을 늘려 친일내각인 김홍집()내각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이완용은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일으켜 이를 막고자 하지만 러시아의 압력으로 인해 실패하고 좌천당한다. 

 

 

친일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서부 열강들은 일제가 거대한 러시아 제국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1905년 예상을 깨고 일제가 승리하게 되면서 힘의 논리를 재파악한 이완용은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다. 철저한 힘의 논리로 정치적 입장을 바꾼 것으로서 이는 당해 11월 체결되는 을사늑약에 앞장서서 동의하면서 친일파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기에 이른다. 이는 1907년(광무10년, 고종43년)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친일내각의 수반이되자마자 당해에 벌어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을 폐위시켜 순종(1874~1926, 재위1907~1910)을 옹립시켰고 당해 체결된 정미7조약에도 앞장서서 찬성한다.

이러한 행태들로 인해 조선인들의 노여움을 샀고 항일운동가들과 더불어 독립운동가들이 이완용을 척결하고자 비밀리에 계획을 하는데 그와중 1909년 12월, 명동성당에 있던 이완용을 나올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올 때 칼로 이완용을 찔러 의거한 이재명(1887~1910)이 대표적이다. 이완용은 칼에찔려 중상을 입지만 살아남긴 한다.

 

경술국치 이후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를 열어 한일병합안을 가결시켜 조선통감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를 찾아가 병합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로 완전히 넘어감에 따라 식민지가 된다.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서는 일을 주도적으로 했던 이완용은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1864~1921)이 시일야방성대곡에서 개돼지만도 못한 대신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백작, 중추원 고문, 막대한 자금등을 받게 되면서 친일귀족의 중심인물이 된다. 이후로도 활발하게 친일활동을 이어나가며 철저히 일제에 충성하는 개돼지 대신으로서 1919년 3.1운동을 비난하는등 매국을 끝까지 이어나가다가 후작작위를 받으면서까지도 계속 이어나간 후 1926년 자택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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