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의주 학살 사건

Mintaka5 2025. 1. 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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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학살 사건, 1919

 

 

배경

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조선 한반도 전역에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다. 이 때 일제에서는 강경진압을 명하고 일제 군인, 경찰들이 이들을 탄압함에 따라 한반도 서북부 중화민국 국경지역이자 만세운동이 뜨겁게 일어나던 도시인 의주에서 일제 군대가 의주의 만세운동을 하던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

 

 

3.1운동

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1910년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독립을 목적으로 만세 운동을 일으키는 기미 독립 운동이 일어난다. 1919년 1월 21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했던 대한제국 광무제(고종, 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됨에 따라 격분한 조선인들은 고종의 장례식인 3월 1일에 맞춰 만세 운동을 계획하게 된다. 

만세운동은 민족대표33인(직, 간접적 48인)에 의해 주도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200만명이라는 민간인들이 만세운동을 펼치며 일파만파 퍼지게되어 3개월간 이어지지만 당시 조선총독부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 재임1916~1919)의 강경한 진압명령에 의해 3개월이후 점차 시들해진다. 

 

발단

1919년 3.1운동이 시작되고 당시 서북부 국경지대 도시인 의주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는데, 3월 1일 당일 오후2시 민족대표33인중 한명인 유여대(1878~1937)*가 설립한 양실학교에서 유여대와 양실학교 교사들*과 함께 의주서교회 공터에서 양실학교 학생과 시민 800여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게 된다. 이과정에서 민족대표33인중 한명인 유여대는 3월 7일 일제 헌병에 의해 체포되어 기소된 다음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게 된다.

*의주 독립만세 주동인물

  생몰년도 비고
유여대 1878 ~ 1937 양실학교 이사장, 민족대표33인중 1인
정명채 1893 ~ ?  양실학교 교사
강용상 1891~ ?  
장창식 1892 ~ ?  
안석응 1891 ~ 1937  
김창건 1872 ~ ?  
김이순 1886 ~ ?  
김두칠 1895 ~ 1965 양실학교 교사

1919년 3월 6일까지 의주 만세운동이 전개되는데 의주서교회 공터에서 800여명으로 시작한 만세 운동에 가담한 시민들은 다음날 3천명의 규모까지 커지고 3월 한달동안 매일 평균 수천여명의 시민, 학생을 포함해 종교인들까지 합세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따라 의주에 있던 일제 군, 경들도 강경진압을 하라는 명을 조선총독부로부터 부여받게 되는데 1919년 3월 29일, 의주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제 헌병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함에 따라 흥분한 시민들이 돌을 던지며 이들을 막고 헌병의 총을 빼앗고 대립이 커짐에 따라 군 병력이 증강되어 헌병 10여명이 발포함에 따라 10여명의 시민이 사망함에 따라 희생자 가족들이 시신을 메고 일제 헌병 주재로소 찾아가 독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이들을 매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데 이 과정에서 대립이 일어나고, 일제 헌병의 계속된 무력진압으로 인해 사상자들이 늘어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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