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한국어, 프랑스어)/고려의 군주

25대 충렬왕

Mintaka5 2024. 9. 3.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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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nyeol de Goryeo, 1236~1308, 재위1274~1298, 1298~1308

 

 

출생

1236년 고려 강화도 별궁에서 아버지 태자 왕전(원종, 1219~1274, 재위1259~1274)과 어머니 경주 김씨(정순왕후 김씨, 1222~1237)사이에서 태어남. 본명은 왕심→왕거.

 

배경

원 간섭기 들어 승하한 후 묘호를 올리지 못한 첫 군주이다. 최씨 정권 중기에 태어나 할아버지 고종(1192~1259, 재위1213~1259)의 승하로 아버지 태자 왕전이 강화를 위해몽골에 가 있었으므로, 태손으로서 임시 정무를 주관하기도 했으며, 아버지 원종 즉위 이후 바로태자에 책봉된다(1260).  무신정권의 종말(1270)을 목격한 증인이고, 이후 1271년 12월 몽고 칸 쿠빌라이(1215~1294, 몽고 칸 재위1260~1271, 원나라재위1271~1294)가 원 제국을 선포한다(국호 '대원', 원나라).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1259~1297)와 혼인하였고, 이후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충실하게 모셨다. 말년에 1294년 쿠빌라이 승하이후 원 성종 즉위때, 고려 내에서도 파가 갈라져 정쟁이 벌어지다 1298년 세자 충선왕(1275~1325, 재위1298, 1308~1313)에게 양위하지만, 7개월만에 충선왕이 폐위된 이후 다시 재위에올라 10년정도 더 머물러 있다 승하한다.

 

그래 어디 도장찍으면 되노?

1259년 친할아버지인 고종(1192~1259, 재위1213~1259)의 승하로 다음 재위는 아버지 태자 왕전(원종)이 물려 받았어야 했지만, 아버지는 몽고와의 강화를 위해 몽고에 가있었으므로 태손 왕심이 할아버지 고종의 장례를 주관하고, 임시로 국정을 돌보게 된다(도장 찍자..).

 

즉위

1274년 아버지 원종(1219~1274, 재위1259~1274)이 승하하는데, 태자 왕심은 이때 원나라에 가있었는데 이유는 마침 아버지가 승하하기 1달전에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1259~1297)와 혼인하기위해서였다. 원나라에 있을때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즉시 귀국해서 개경에서 25대 충렬왕(1236~1308, 재위1274~1298, 1298~1308)으로 즉위하게 된다.  

 

(일본)니들 후회하게 될끼다이

I. 1차 일본원정

1274년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이 시작되는데, 이미 쿠빌라이는 1267년에 일본에 사신을 보내 친서를 전달케끔했지만 일본측에선 쿠빌라이의 친서를 무시하게 되면서, 대대적인 침공계획을 잡으면서 고려에 원종에게도 조서를 보내 가는길 건드리지 말라고 통보하고 그 대가로 고려에서 정기적으로 상납하는 공물의 양을 줄여주는대신에 원정나갈때 협조를 종용하게 된다(사실상 출정 강요) . 

그렇게 원은 훈둔(?~?)을 필두로, 고려는 김방경(1212~1300)이 사령관으로서 일본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것이 1274년에 일어난 1차 일본원정이다. 당시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9백여척(4만군사)의 고려-원 함대가 규슈쪽으로 쳐들어오게되면서 초토화시키고 있었는데, 마침 10월경이라 일본에 태풍이 많이 불어닥치게 되면서 고려-원 연합군에 지속적인 피해발생, 보급물품이 태풍에 의해 쓸리는등 전투전에 차질이 계속 생기면서 일단 철수한다. 

고려입장에서 장기전으로 갔으면 어쨌을까 싶은 1차 일본원정은 이렇게 종료된다.

II. 2차 일본원정

충렬왕 7년인 1281년에 쿠빌라이는 또 다시 일본침공을 명하게 되면서 고려를 탈탈 터는데 이번엔 강남군까지 다 합쳐서 3500여척이라는 대함대에 15만에 달하는 원정군이 꾸려지면서 야심차게 출발하지만 이번에도 태풍으로 인해 시작부터 대량의 전사자가 발생하게 되면서 아주그냥 탈탈털린다. 원나라 군대만 하더라도 10만이 훨씬 넘었는데 그중에 수만명이 바다에 잠겼으니..

그렇게 1, 2차 일본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나게 되며 일본원정은 잠시 주춤하게 된다.

III. 3차?

그러나 쿠빌라이는 두번의 원정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 3차원정을 무리하게 계획하는데,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와 고령(80세경)으로 인해 몸도 많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1294년 79세로 승하하게 되면서 일본원정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된다.   

 

업무하나는 내가 끝내주지...?

충렬왕은 1278년 원나라로 가서 아버지 원종때 쿠빌라이로 부터 받아낸 불개토풍(고려의 정체성을 그대로 이어가도 좋다 뜻)으로 고려의 존속을 이전보다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약속을받아내는데, 이로 인해 고려에 주둔하고 있던 원나라 군대(주고려원군..)와 다루가치(행정감독관)을 모두 원으로 다시 쫓아내는 등 자치성을 더욱 띠기위해 노력한 점이 있다.

영토또한 아버지 원종때 잃어버린 탐라(제주도)를 받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할아버지 고종때 뺏긴 쌍성총관부는 못받아낸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1288년 전민변정도감을 재설치하면서(1차는 1269년 원종때) 고위 귀족들의 전민(토지)을 빼앗아 권세있는 자들의 불법적인 토지소유(대농장주주), 백성들의 궁핍을 해결하고자 하는 동시에 왕권까지 강화하는 효과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충렬왕때 전민변정도감은 전민을빼앗은 세력이 기껏해봤자 아내인 제국대장공주쪽 측근들에 해당했을 뿐이라 실질적인 효과는 1300년대 중후반이 되어야 나타나는 실상.

 

선위...?한지 얼마되었다고 다시?

1297년 아내 제국대장공주(1259~1297)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망하면서 세자였던 왕원(충선왕)이 마침 원나라 공주 계국대장공주와 혼인을 하고 급하게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왕원은 평소 어머니 측근 세력을 무시하고 시기하던 무비와 측근을 그자리에서 죽이면서 충렬왕은 싫증을 느껴 1298년 세자 왕원에게 양위를 하기에 이르고 충렬왕은 상왕으로 물러나게 된다.  

충선왕은 즉위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발표하는데, 이 내용들이 반원 정책으로 보일만큼 위험한 조치였었기에 여러 문제가생기면서 대신들의 반발과 모략으로 인해 즉위한지 8개월만에 폐위되고 원나라로 끌려가버리고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후에도 충선왕과 충렬왕간에 부자지간 정쟁이 계속해서 지속되게 되면서아주그냥 원나라까지 꼬이면서 개판5분전이 됨과 동시에 원나라에서도 중재를 위해 결국 1306년 충선왕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마무리가 된다. 사실상 충렬왕은 실각한 허수아비 군주 신세.. 

 

승하

1306년부터 실각한채로 그냥 조용히 지내다가 2년뒤 1308년 승하하면서 다시 아들 충선왕이 복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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