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고려의 군주

23대 고종(고려)

Mintaka5 2024. 9. 2.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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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jong de Goryeo, 1192~1259, 재위1213~1259

 

 

출생

1192년 고려 개경 별궁에서 아버지 태자 왕숙(강종, 1152~1213, 재위1211~1213)과 어머니 태자비 왕씨(원덕왕후, ?~1239)사이에서 태어남. 본명은 왕철.

 

배경

고려 475년 군주 역사상 가장 긴 재위(45년 10개월)기간을 가지지만, 1170년 무신정변이후 무신들이 통치하는 시대에 할일 없는 허수아비 군주로서 무신정변 초기 군주들보다도 더 약한 황권을 가지게 되며 아예 권한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되어버린 비운의(?!)군주다. 거기에 모자라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본격적인 침입으로 인해 무신정권에 의해 강도(강화)로 천도를 하며 그냥 순순히 따르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도 처한다. 승하할때까지 몽골의 침입을 계속 받는등 한국사에서 보기 힘든 고난이 매우 심한 군주중 한명이다.

이 난세에 원래는 군주가 되기 힘든 위치였다. 1197년 할아버지 명종(1131~1202, 1170~1197)이 최충헌에게 폐위되면서 유폐되고, 아버지 강종역시 폐태자되면서 왕철 본인과 같이 강화도로 유배가게 된다. 이후 작은아버지인 희종(1181~1237, 1204~1211)이 1210년에 희종이 강종과 아들 왕철을 개경으로 다시 부르지만, 희종은 1211년 최충헌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폐위되면서 아버지 강종이 최충헌에 의해 즉위하게 된다.

 

즉위

위 배경부분처럼 아버지 강종이 즉위하지만 모든 실권은 최충헌에게 있었고, 이미 59세의 고령으로 즉위한 강종인지라 2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승하하면서 왕철이 23대 고종(1192~1259, 재위1213~1259)으로 즉위하게 된다. 역시 실권은 최충헌에게.  무신들로부터 권력이 나오던 때에 고종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거의 없었다. 

 

몽골이 슬슬?..

1200년대 아시아, 동유럽쪽은 말그대로 몽골 천하라고 봐도 무방할정도로 아주 강성했던 시대인데, 이를 가능하게 했던 인물은 몽골 제국 초대 칸인 테무친(칭기즈 칸, 1162~1227, 카묵몽골재위1189~1227, 몽골 칸 재위1206~1227)이 있었다. 1206년 칭기즈칸이 칸으로 즉위하면서 부터 중원땅엔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때 모든 출정준비가 끝난상태로 통일된 몽골로서 이제 정복하는 일만 남은 시점에.. 본격적으로 정복에 나서기 시작하는 해이기도 하다.

고려는 1213년 건국된 거란의 잔당들로 이루어져있는 동요를 야율유가가 건국한이후 재기를 노리지만 몽골군에 계속 쫓기게되면서 그 길을 고려로 잡게 되면서 1216년 이들이 고려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몽골군은 여진, 동진과 동맹을 맺고 고려로 쳐들어온 동요를 소탕하기위해 고려에 쳐들어 오는데 고려도 몽골과 연합해 동요 세력을 강동성에서 소탕하게 되는데, 이것이 강동성 전투(1218~1219)이다. 1216년부터 시작된 동요의 침략은 1219년 일단 마무리가 된다.

 

이것들이 어디서 행패를? (아차)

몽골은 이 전투를 계기로 마치 고려에 은혜를 베푼 마냥 조공을 요구하고 난리를 치는 등(못배운..) 반몽 정서가 고려전체에 퍼지게 되는데,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몽골로 귀국하던 중에 고려 국경인 압록강근처쪽에서 의문의 자객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누가 죽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명백한 고려의 영토 내에서 몽골의 사신이 죽었기 때문에 몽골은 고려에서 행한 일이라고 밀어붙이는 억지를 부리는데.. 결국 강화조약을 체결하며 몽골출신 관리인 다루가치(행정감독관)을 각지에 두게하면서 더욱 정서가 좋지 않게 된다. 이 두국가는 사실상 적국이 되면서 침공의 명분을 심어주고 만 것. 

이 때 고려는 1219년 최충헌(1149~1219)이 사망하고 아들 최우(1166~1249)가 집권자로서 고려를 사실상 운영하고 있었는데, 왕실에서 슬슬 권력을 장악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면서 1225년 최우가 정방을 자택에 설치해 국가의 모든 행정권을 가져와 이곳에서 정무를 보게끔 하니, 안그래도 없던 권력의 황권이 아예그냥 상징적인 존재로 밖에 남지 않게 된다(강제적 입헌군주제).

 

여몽전쟁 시작

I. 제1차 침입

1231년 9월 몽고 제국 2대 칸 오고타이(1186~1241, 1229~1241) 1225년 있던 저고여 피살사건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게 되는데, 이것이 여몽전쟁 제1차 침입이다. 이 때 몽고군 총사령관으로는 원수 살리타이(?~1232), 부원수 탕구타이(?~?), 1군장수 푸타우, 2군장수 디주등을 삼아 고려를 침입해온다. 

파죽지세로 의주(함신진)에서 몽고에 투항하여 몽고군이 된 홍복원(성문을열어 항복한 매국노, 1206~1258)과 방수장군 조숙창(?~1234), 낭장 문대(?~1234) 함께 철주(현 평안북도 철산군)에 도달하지만, 철주방어사 이원정(?~1231)과 판관 이희적(?~1231)이 2500여명의 병력과 백성들과 힘을 합쳐 끝까지 버티면서 결사항전을 펼치게 되면서 몽고에서 낭장 문대를 성문앞에 보내 항복을 종용하게끔 하지만 오히려 문대는 절대 항복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몽골군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계속 외치지만, 결국 몽골군에 의해 죽게 된다. 철주성에선 식량, 화살등이 다 떨어져 더이상 버티지못할 상황까지 오게 되면서 이원정과 이희적은 가족들과함께 화약고에 불을질러 모두 자결함으로서 철주성까지 함락당한다.  

이후 귀주에까지 몽고군이 쳐들어오는데, 귀주성을 지키던 박서(?~?), 김경손(?~1251)의 기막힌 방어로 맹공을 퍼부어도 귀주성이 함락되지 않게 되면서 그냥 쌩까고 개경으로 진격하면서 포위당하게 되는데 이에 수도가 공격받으니 대책이 서지않던 고려정부에서 강화를 요청하여 맺어지게 되면서 귀주성역시 항복하게 되면서 전투가 종료되고 다시 다루가치(행정감독관)를 임명하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다.

 

II. 제2차 침입

1차 침입때 몽고군이 개경을 에워싸면서 맺어지게된 강화로 몽골은 철수하지만, 최우는 이때의 강화로 시간을 벌어 강도(강화)로 천도를 단행하게 되면서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면서 이를 안 몽고역시 빡쳐 다시 살리타이를 원수로 침공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여몽전쟁 제2차 침입이다. 이때 마침 함신진에서 성문을열어 몽고를 도왔던 홍복원(1206~1258)이 고려를 배신하고 몽고군에 들어가면서 손쉽게 서경을 빼앗겨버리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현재 김포지역에서 강도(강화)에 계속 사신을 보내면서 항복을 요구하지만(몽고는 해전에 약함..그리고 강도로 가는 길목은 바닷물이 소용돌이 칠 정도로 강한 물살을 가져 감히 몽고의 배로는 건너가기 힘든 바다였다)거부.

본군은 남경을 점령하고 남하하고, 1군과 2군(1군 푸타우, 2군 디주)은 경상도쪽으로 급속도로 침입하면서 대구 부인사에 소장되어있던 초조대장경이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리는 아픈 역사가 이때 벌어지고 만다. 그러나 본군이 처인부곡(현재 용인시)을 공격할 때 원수 살리타이가 승려 김윤후(?~?)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대열이 엉망이된 몽고군이 철수하기에 이르는데, 이로서 2차 침입이 끝난다. 

 

III. 제3차 침입

1234년 금나라가 몽고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난 이듬해 1235년 몽골은 다시 고려를 치러 오는데 이번에는 1,2차 침입과는 규모가 달랐다. 이전에 살리타이 원수의 바로 밑 부원수로 있던 탕구타이가 이번엔 원수로서 침입을 하게 되는데, 이번엔 아주그냥 고려 전역을 아작내기에 이르는데, 그럼에도 강도(강화)만큼은 침입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려 전역을 아작내며 경주 황룡사에 불을 질러 전소시키는등 문화재를 약탈하고 전소시키는 등의 피해를 안기면서 큰 손실을 야기하게 된다. 

이에 고려 정부에서 부처의 힘을 빌려 이 난세를 극복하고자 하기 위해 1236년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한다만, 그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육지에서 몽고군의 만행이 지속되면서 강화를 다시 제의하게 되면서 고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철수하게 되는데, 고려는 약조를 이행하지 않고 고종의 병을 이유로 미루고미루다가 결국 신안공 왕전()을 왕의 아우로칭하고, 영녕공 왕준()을 왕자로 가장해 몽골에 보내게 되지만 이후에 들키고 만다.

 

IV. 제4차 침입.. 그만좀 와라.. 글 길어진다

3차침입(1235~1239)이 끝난이후 8년이 지난 1247년 계속해서 강도(강화)에서 여전히 버티고 약조를 지키지 않는 고려에 분개해 또다시 몽골에서 아무간(?~?)이 또 쳐들어오지만 몽고 황실의 분란발생으로 인해 몇개월만에 다시 철군함으로서 고려로서는 시간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교정도감 급 구도변화

1249년 30년간의 집권을 뒤로 사망한 교정별감 최우(1166~1249)의 뒤를 이어 그의 서출차남인 최항(1209~1257)이 교정별감에 오르게 되면서 고려의 실권을 맡게 되는데 폭정, 도덕성말살로 많은 중신, 대신등을 살상한 인물이다. 게다가 서출출신이라는 열등감까지 가지고있던 터라 시기심까지 심각했던 최항으로서, 1249년 김약선의 아들 김미(김경손의 조카이자 최항의 사촌)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난리가 나면서 김경손은 최항에게 용서를 구하기위해 직접 찾아가지만 김미는 승려로만들어버리고, 김경손은 백령도로 유배보내버리고 사사한다. 

최충헌, 최우대의 중신들이 이때 조사도 하지않고 조금의 심증으로 죄를 물어 다 죽여버리는등 폭정을 일삼다가 1257년 독살되면서 마무리가 된다.  

 

최씨정권 끝?

1257년 최항이 독살되고 서출인 최의()가 교정별감이 되지만, 고종은 대사성 류경(1211~1289)과 김준(?~1268), 최온(?~1268)등과 협의하여 최의를 살해하고 황실에 권력을 돌려줌으로서 도방까지 혁파하여 60여년간의 최씨정권(1196~1258)이 막을 내리게 되고 김준이 새로운 교정별감이 되면서 더욱 큰 권력을 가지게 된다.

 

승하

1259년 고종은 45년간의 긴 재위기간내내 무신정권의 감시와 몽고의 침입속에 간신히 버티다가 승하한다. 후임은 24대 원종(1219~1274, 재위1259~1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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