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Capétiens, 카페왕조

필리프3세

Mintaka5 2024. 7. 16.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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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e III, 1245~1285, 재위1270~1285

필리프3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245년 프랑스 푸아씨(Poissy)에서 아버지 루이9세(Louis IX, 1214~1270, 재위1226~1270)와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프로방스(Marguerite de Provence, 1221~1295)사이에서 태어남.

위로 형이 한명 있어서 왕이될 운명은 아니였지만, 1260년 형 루이 드 프랑스(Louis de France, 1244~1260)가 16살의나이로 사망하면서 후계자가 된다. 필리프는 온화한 성품에 수줍음이 많지만 다재다능한 좋은 머리를 갖고있었지만, 부모의 강한성격에 압도되면서 눌러살다시피 한다.

 

결혼

1258년 차이메1세 다라곤(Jacques Ier d'Aragon, 1208~1276, 재위1213~1276)과 루이9세간에 체결된 코르베유 조약으로 아라곤이 남부 프랑스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면서, 조약의 내용에따라 아들 필리프와 차이메의 딸 이사벨(Isabelle d'Aragon, 1247~1271)간에 결혼이 이루어진다.

루앙에서 거행되었고, 4명의 아들을 두었다.

  프로필
루이 드 프랑스 Louis de France, 1264~1276
미남왕 필리프4세 Philippe IV le Bel, 1268~1314, 재위1285~1314
로베르 Robert, 1269~1276
샤를 드 발루아 Charles de Valois, 1270~1325

 

8차 십자군.....? 어 끝났네..?

1270년 필리프는 아버지 루이9세와 함께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벌어진 8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일어난 배경은 루이9세의 동생 샤를 당주 '카를로1세'(Charles d'Anjou, 1226~1285, 재위1266~1285)가 시칠리아의 왕이되는것을 승인하고, 1270년 아프리카 맘루크 술탄국의 세력을 저지하기위해서 본인이 십자군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동생 샤를당주가 다스리던 시칠리아 바로너머 튀니지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해 형에게 이쪽부터 치자고 함..

그러나 원정을떠나고 튀니지의 수도 카르타고를 점령하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십자군을 휩쓴 이질에 걸림으로서 필리프의 동생 장 트리스탄(Jean Tristan, 1250~1270)이 먼저 사망하고, 3주뒤에 아버지 루이9세역시 이질로 사망하게 된다. 

십자군원정대장이 사망함으로서 8차십자군도 와해되고, 필리프는 아버지의 유해를 이끌고 파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튀니지에서 루이9세가 사망하자마자 점령한 튀니지에서 필리페3세라는 이름으로 왕으로 선포되지만 전투는 잘해서 용맹왕이라는 별명까지 있지만 군대를 지휘할 능력이 부족했던 필리프였기에 삼촌 샤를 당주가  튀니지의 술탄인 아브드알라 무하마드 알 무스탄시르(Abû `Abd Allah Muhammad al-Mustansir, 1228~1277, 재위1249~1277)와 협상하여 10년간의 휴전협정을 체결한 다음에야 파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쭈?

파리로 돌아와서 친정을 시작하면서 즉위1년차인 1271년 삼촌인 알퐁스 드 푸아티에(Alphonse de Poitiers, 1220~1271)가 9차십자군에 출정했다 사망하면서 삼촌이 가지고있던 툴루즈, 푸아투, 오베르뉴등을 흡수시킨다(알퐁스에겐 자식이 없었음). 

그러나 1272년 툴루즈 남부 푸아(Foix) 백작령은 왕실흡수를 반대하면서 공성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푸아백작과 아르마냑 백작이 필리프3세에 맞서 반기를 들면서 빡이친 필리프3세는 말그대로 군대를 이끌고가서 무참히 입성한다.. 그리고 왕실에 흡수된다. 

 

시칠리아 만종사건

삼촌 샤를 당주가 다스리던 시칠리아에는 샤를의 폭정으로 인해 백성들이 폭발직전이였는데, 부활절 미사 이틀뒤 저녁미사 만종이 울릴 무렵에 봉기가 일어난다. 프랑스인에게 죽음을 이라는 외침과 함께.

안그래도 프랑스인에대한 시칠리아인들의 분노가 상당했는데, 1282년에 프랑스인을 모욕하기위해 어린이들이 돌을 던졌는데, 프랑스군은 지나가던 시칠리아 청년을 살해함으로서 분노한 시칠리아인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 이때 분노한 시칠리아인들이 하룻밤사이에 2000명에달하는 프랑스인을 학살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시칠리아 전체에 비상이걸리면서 샤를역시 반란을 제압하기위해 군대를 투입시키지만, 그와중에 아라곤에서 페로가 왕을 자처하며 샤를을 공격하면서 어쩔수없이 프랑스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페로는 시칠리아에서 즉위하며 페로3세(Pero III d'Aragon, 1239~1285, 아라곤재위1276~1285, 시칠리아재위1282~1285)가 된다.

 

왕의 유해가 천킬로미터바깥에 있다.. 우째 가꼬오노

이 사건 이후, 필리프3세는 아라곤 십자군(1284~1285)를 천명해 아라곤왕 페로3세의 통치구역인 카탈루냐를 공격하지만(주도 지로나 포위), 삼촌이 전염병이 퍼지면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밀리고 밀리다가 필리프3세 자신역시 병을 얻어 1285년 10월 초 페르피냥에서 서거한다. 

파리에서 약 1천킬로미터 떨어져있는 페르피냥에서 서거하게되면서 어떻게 시신을 모시고오느냐가 핵심 문제가 되었는데(왕의 시체가 부패하면 안되니,...), 어쩔 수 없이 필리프3세의 시신을 4부분으로 나누어 장기가 각각 노르망디, 나르본, 생드니, 파리등으로 나누어져 보내진다

이런 다중 매장 관행은 이후1299년 교황 보니파시오8세(Bonifacius PP. VIII, 1235~1303, 1294~1303)에의해 금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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