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고위 귀족/Capétiens, 카페왕조

루이7세

Mintaka5 2024. 7. 1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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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VII, 1120~1180, 재위1137~1180

루이7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120년에 아버지 루이6세 뚱보왕(Louis VI le gros, 1087~1137, 재위1109~1137)과 어머니 아델레이드 드 사부아(Adélaïde de Savoie, 1092~1154)사이에서 둘째아들 루이 드 프랑스로 태어남.

 

아부지 첫째만 아들인교

1131년 루이6세의 장남이자 루이 드 프랑스의 형인 필리프 드 프랑스(Philippe de France, 1116~1131)가 파리 생 앙투안 로(Rue Saint-Antoine)에서 낙마사고로 급작스럽게 사망해버린다. 이 사고로 루이 드 프랑스가 11세로서 왕위 상속자가 된다.

장남을 잃은 늙은 루이6세는 이후 힘이 빠져버려서 후계자인 아들 루이를 딱히 신경쓰지 않아버리는데, 이후 힘없이 살면서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1137년 8월 첫날 이질로 서거한다(루이6세의 별명 le gros가 '거대한'이라는 프랑스어 형용사형태인데, 선천적인 비만이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즉위

아버지 루이6세가 서거한 1137년 8월, 첫째아내 엘레오노르 다키텐(Aliénor d'Aquitaine, 1122~1204)과 즉위하게 된다(루이6세가 죽기전에 아키텐 공작에게 아들의 결혼을 주선함). 엄청난 재력과 영지를 가진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으로 가져온 거대한 지참금으로 왕실gdp규모가 3배이상 늘어남. 그러나 아키텐의 영지는 왕실영토에 흡수되지는 않고 엘레오노르 역시 프랑스의 왕비직함을 포함해서 아키텐 여공작직함은 유지하게 된다.

루이7세는 우울한모습과 약한 성격, 의지가 약하지만 고집이 쎈등 즉위초반부터 정치적으로 오류를 범하는데, 엘레오노르와도 안그래도 성격이 맞지않았고 루이는 엘레오노르의 공로를 본인의 공로로 돌리고 아키텐 주도 푸아티에(Poitiers)에서 자치 공동체를 만들려는 백성들을 진압하고 도시 내 귀족자녀들을 체포하고 심지어 조공을 거부한 기욤 드 르제(Guillaume de Lezay)를 체포하기에 이른다.

 

2차 십자군

1145년 교황 에우제니오3세(Eugenius PP. III, 1080~1153, 재위1145~1153)는 루이7세에게 교서를 보내서 두번째 십자군 원정군을 결집시켜달라는 부탁을 하고 루이7세는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동의하고 군대를 결집시킨다. 교황 에우제니오3세는 보통 평시때 세금을 내지않는 교회에도 세금을 부과해서 십자군 원정 자금을 조달하는 권한을 루이7세에게 부여하면서 1147년 십자군 출정 전까지 모든계층에 걸쳐서 세금을 걷는다.

1147년 6월중순, 신성로마제국 메츠(Metz)에서 군대가 집결하게되는데, 이후 출전을 하고 신성로마황제 콘라트3세( Conrad III, 1093~1152, 재위1138~1152)와 합류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거치는데, 동로마제국은 돕기는 커녕 해를 끼치고 루이7세의 약한의지등으로 결집이 안되는 군대가 투르크에게 첫 패배이후 시리아에서 여러차례 무너지면서 1148년 현재의 튀르키예와 시리아 국경지역 안티오크(Antioch)에서 푸아티에 백작 레몽 드 푸아티에(Raymond de Poitiers, 1115~1149)가 대신 지휘하면서 나름 잘 운영이 된다. 

그러나 엄청난 전쟁비용으로 프랑스의 미래에 심각한 피해가 벌어짐으로서, 원정자체가 길어지면서 자리를 비운 루이7세로서는 다른 영주들을 관리하지 못해서 지배력이 약해지는 결과까지 벌어지면서, 이 희망이 크게없는 십자군에서 패하고 돌아오기까지 한다면 궤멸적인 피해를 볼 것이 뻔했기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후 점점 엘레오노르와의 관계가 악화됨으로따라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1152년) 엘레오노르는 지참금을 돌려받고 무효 2달만에 11살 연하 앙주백작 앙리 플렌테저넷(잉글랜드 헨리2세, 1133~1189, 재위1154~1189)과 재혼하게 된다(헨리2세는 초혼).

 

내땅보다 더 크지 왜?..아..

이후 앙리 플렌테저넷은 1154년 잉글랜드에서 헨리2세(Henri II, 1133~1189, 재위1154~1189)로 즉위하게 되면서 잉글랜드의 왕비로 즉위하게 된다. 루이7세때 영토까지는 안넘겨줬는데, 보란듯이 지참금과 함께 광활한 아키텐의 영지를 헨리2세에게 넘기면서 헨리는 사실상 프랑스 왕국보다 더 광활한 영지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다(앙주제국). 

이후 100여년간 잉글랜드 플랜테저넷 제국과 카페왕조는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영토분쟁을 하게 된다.

 

3번째 와이프

재혼한 왕비 콘스탄스 드 카스티유(Constance de Castille, 1136~1160)가 24세로 서거하면서, 루이7세는 3번째 왕비 아델 드 샹파뉴(Adèle de Champagne, 1140~1206)와 결혼하면서 샹파뉴 백국과 동맹을 강화시키고, 헨리2세에 대항하는 영향력도 키우는 효과를 낸다. 

 

물건이 나왔다

1165년 루이7세의 유일한 후계자 필리프 오귀스트 '미래의 필리프2세'(Philippe II Auguste, 1165~1223, 재위1180~1223)가 태어난다. 이 인물로 인해 앞으로의 프랑스의 영토가 뒤바뀔줄은 어떻게 알았을까..? 루이7세와의 생각이 비슷했던 필리프였기에 이후에 헨리2세와 그의 아들 리처드(Richard I, 1157~1199, 재위1189~1199)와 갈등을 일으키게 하여 중심을 흔들리게 하면서 아버지 루이7세가 똑같이 썼던 방식을 그대로 써먹는다(필리프2세가 서거한 1223년에 프랑스 거의대부분영토가 프랑스 왕국 직할이 된다).

뭐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3세(Alexander PP. III, 1105~1181, 재위1159~1181)가 개판5분전인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1177년 헨리2세와  루이7세를 화해시키는 조약체결을 강요하는데 이것은 1180년 6월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불가침 조약인 기조르 조약(Traité de Gisors, 1180)이 체결된다. 

 

서거

이미 1년전 1179년 노쇠한 루이7세는 아들 필리프 오귀스트와 공동재위를 하게되지만 사실상 국정은 아들 필리프에게 맡기고, 1180년 서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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