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III, 1738~1820, 재위1760~1820
출생
1738년 웨일스 공 프레데릭(Frédéric de Galles, 1707~1751)과 어머니 오거스타 드 작센고타알텐부르(Augusta de Saxe-Gotha-Altenbourg, 1719~1772)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남(장남).
조지3세는 독일(하노버)에서 태어난 증조할아버지 조지1세(George I, 1660~1727, 하노버재위1698~1727, 영국재위1714~1727), 할아버지 조지2세(George II, 1683~1760, 재위1727~1760)와들은 달리 영국에서 태어난 군주로서, 영어를 모국어로 다룰줄 아는 하노버왕가 최초의 왕이였음.
유년기
한국으로 치면 칠삭~팔삭둥이(7개월~8개월)에 해당하는데, 생존가능성이 낮았던 만큼 태어나자마자 성공회 세례를 받고, 한달만에 다시 세례를 받아 왕자의 건재함을 나타냄.
MBTI I수치가 높았을 거 같은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는데, 머리는 좋아서 8살(1746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도, 영어와 독일어로 당시 유럽의 정세에 대해 논평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음. 거기다 물리학, 화학등의 과학을 연구한 최초의 영국군주이자, 수학, 천문학, 프랑스어, 라틴어, 역사, 지리, 상업, 농업, 법률, 스포츠, 댄스, 펜싱, 승마까지 그냥아주(엄친아) 고루(그러나 깊지는 않았고..) 연마했다고 함.
그러나 할아버지 조지2세와 사이가 좋지않았던 아버지 프레데릭이였기에, 조지2세는 손주들에게 관심이 크게 없었음.. 이후 1751년(13세때) 아버지 프레데릭이 사망하면서 조지3세가 왕태자가 되면서 아버지가 가지고있던 웨일스, 에든버러공작 작위를 승계 받는다.
왕위승계
1760년 할아버지 조지2세(George II, 1683~1760, 재위1727~1760)가 서거하면서 조지3세(George III, 1738~1820, 재위1760~1820)로서 영국 국왕으로 즉위하게 됨. 즉위이후 의회에 입성 연설을 하러가서 "영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았고, 영국의 이름으로 나의 영광을 되찾겠다"라고 연설하는데 이는 이전 증조부 조지1세와 할아버지 조지2세가 영국보다 하노버에 더 관심이 있었던 거에 반해 본인은 그들과 다르게 영국을 위해 몸 바치겠다 라는 뜻에서 한 말.
7년전쟁
1760년 즉위당시 이미 진행되고있던 7년전쟁(1756~1763)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당시 의회에서도 토리당 휘그당의 의견, 입장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면서 정치적 불안정이 고조되던 시기. 조지3세마저 토리당사람들에게 좀 더 호의적이라고 해서 휘그당에서는 독재군주라고 비난하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였을 듯.
1761년 윌리엄 대(grand)피트(William Pitt-l'Ancien, 1708~1778, 아들 소(petit)피트와 이름이 같고, 부자가 총리를 역임해서 대/소로 구별함)가 사임하고, 1762년 7년전쟁 막바지 무렵 영국의 여당인 휘그당의 총재(수상)는 토머스 펠럼홀스(Thomas Pelham-Holles, 1693~1768, 재임1757~1762)마저도 재정 비리 의혹으로 사임하면서 항상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조지3세가 신뢰하던 뷰트백작 존 스튜어트(John Stuart, 1713~1792, 재임1762~1763)을 수상에 올리나 이후 1763년 7년전재잉 끝난 후 전쟁으로 악화된 경제문제와 불안정한 사회안정등의 과제가 올라와있었는데 당시 영국은 아직까지 정치적으로 안정화가 크게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로 양당이 서로 물고 뜯고 트집을 잡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게 일상이였음.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정치인들까지 서로 물고 늘어져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스스로 총리에서 물러나게 됨.
미국식민지 문제와 보스턴 차 사건
북미(미국동부~캐나다동부지역) 식민지의 불만이 1770년대에 들어서 끓어오르면서, 차에 매겨진 세금을 철폐하는등 민심을 달래려고 애쓰던 영국이였지만, 1773년 보스턴 항구에 정박해있던 차를 실은 배가 습격당하면서 실려있던 차들이 대서양에 던져지는데 이로인해 영국의 여론이 급진적으로 미국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나빠지는데, 이로인해서 1774년 영국 의회를 통과한 참을 수 없는 법(Lois intolérables)이 미국식민지를 포함한 10여개의 식민지의 분노와 빡침을 자극하면서 이때부터 사실상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된다고 보면 됨.
정신질환의 시작
1780년대부터 조지3세의 건강이 안좋아지기 시작했는데, 혈액질환과 관련된다. 당시 의학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시기로서, 민간요법이 적용되는등 딱히 효과가 있지는 않았는데 정신질환이 점점 더 안좋아지게 되면서, 1788년 의회에서 조지3세가 통치능력이 발휘되지 못한다는 명목으로 섭정을 누구로 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계속 벌이게되는데, 이후 조지3세의 아들이자 장남 웨일스 공(미래의 조지4세, George IV, 1762~1830, 재위1820~1830)이 섭정이되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합의를 하게 됨.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1789년 유럽군주제 전체를 뒤흔든 프랑스대혁명이 터지고, 이로인해 1792년 프랑스 군주제 폐지라는 큰 사건과 동시에 루이16세(Louis XVI, 1754~1793, 재위1774~1792)의 처형으로 인해 귀족들이 많이 불안해했다. 이를 대비해 군대를 정비하여 프랑스하나를 상대로 유럽 군주제 국가들이 전쟁을 하면서 군주제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게 되지만...
이후 더 큰 파도가 치는것이 나폴레옹(Napoléon I, 1769~1821, 재위1804~1814, 1815)의 등장으로 인해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나폴레옹에게 무릎을 꿇고 영국만 남게되면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하게 됨.
한때 나폴레옹과같은 황제로서 분쟁의 격을 맞추기 위해 칭호를 왕에서 황제로 개칭하려는 제안이 있었지만 거절. 뭐 영국으로서도 당시 그렇게 재정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나폴레옹에게 직접적으로 자극했다가는 영국이 더 타격이 클 것으로 생각되어 안정을 추구하기위해 평화협정과 동시에 시비를 거는 양면전술을 적용했었음.
건륭제
청나라와도 무역규모를 늘려 청나라내 영국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하여 특사를 보내는데, 당시 청나라 황제 건륭제(Qianlong, 1711~1799, 재위1735~1796)에게 희귀템을 주면서 합의점을 찾는등 노력을 많이 함. 건륭제 재위기간 끝나기전까지도 계속해서 대사파견, 특사, 부사등을 보내면서 접촉을 계속 하게 됨. 그러나 1792년에 파견된 조지 매카트니 백작(George Macartney, 1737~1806)이 조공사절이 아닌데, 조공사절단으로 인식한 건륭제에게 삼궤구고두(.. 인조가 했던)를 요구받는데 이를 속국의 신하가 아니라 못하겠다라고 매카트니가 말한 이후, 조지3세의 친서에 담긴 무리한 요구를 건륭제가 열이 받아 거부한 후 거진 쫓아내버림. 이 이후 영국-청나라 관계악화로 후에 아편전쟁이 벌어지는 원인이 됨.
서거
1810년대에 막내딸이 먼저 죽는 등 충격을 받으면서 이전에 왔던 정신질환 증세가 다시 나타나는데 저번처럼 회복되지는 않고, 더욱 심해져 분열증에 걸리고 사실상 아들 조지4세가 섭정이 되어 통치를 하는 상황에 조용히 왕궁에서 병마를 치료하다가 1820년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