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201대~현직 교황

알렉산데르7세

Mintaka5 2024. 6. 1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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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파비오 키지 Fabio Chigi

Alexander PP. VII,  1599~1667,  재위 1655~1667

알렉산데르7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99년 토스카나 대공국 시에나(Siena)에서 아버지 백작 플라비오 키지 (Flavio Chigi, 1549~1615) 와 어머니 로라 마르실리 (Laura Marsili, 1567~1639) 사이에서 11명중 일곱째로 태어남.

파비오 라고 하겠음

 

교황의 조카, 박사학위3개..

교황 바오로5세(Paulus PP. V, 1550~1621, 재위1605~1621)의 조카인데 어릴적부터 신앙에있어서 엄격하고 열성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되는 계기가 됨. 

은행가문인 키지가문의 일원으로서, 어릴적부터 튼실하게 교육을 받아 가정교사로서 벌이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후 태어난 고향의 학교 시에나 대학교에서 3개 분야(철학, 법학, 신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할말이 없네..).

그저, 학위3개에 해당하는 공부만했다는게 아니라  문학, 철학, 역사, 건축등에 있어서 매우 광범위한 지식을 터득하게 됨.

 

성직자

파비오는 3개학위를 다 받고 1626년 졸업한 후, 교황청으로 와서 경력이 시작되는데(아직 사제서품 받기전), 첫 시작이 1627년 교황 특사 보좌관으로서 중북부 페라라(Ferrara)에서 시작된다. 

1634년 사제서품을 받고 1639년까지 이단심문관등 관직을 거치면서 그 노고로 1639년 쾰른 주교로 가게 됨. 파비오는 당시 유럽전역을 휩쓴 종교전쟁인 30년전쟁(La guerre du cent ans, 1618~1648)에 관련된 일로  가게된 것이였는데, 1648년 종전이 되면서 마지막 사후 종전계약인 베스트팔렌 조약(Les traités de Westphalie, 1648)에서 교황청을 대표한 평화협상 대사가 되어서 마무리를 짓게 되는데, 유럽의 군주들 앞에서 조약의 조건에 어긋나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교회의 이익에 반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들면서 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약이 체결되면서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10세(Innocentius PP. X, 1574~1655, 재위1644~1655)의 교황권을 대신하여 항의를 하게 되는데,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도 마찬가지로 조약으로 체결된 평화가 "무효, 무효,유효하지않고, 부당하고, 저주받고, 버림받고, 무능하고, 영원히 의미도 없고, 효과도 없는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공개적으로 비난하기에 이름. 


수고했데이 다시 온나

베스트팔렌조약 체결 이후, 인노첸시오10세는 파비오를 다시 교황청으로 불러들여서 교황청 국무원장(직책직위-추기경, Cardinalis Secretarius Status)에 임명시킴과 동시에 부제급 추기경으로 승품시킴(교황청에서 맡는 직책장은 보통 추기경이 맡는게 관례). 그리고 또 한달도 안있어서 바로 윗등급 추기경인 사제급 추기경으로 승품시킨다(추기경 서열: 주교급 추기경>사제급 추기경>부제급 추기경).


만장일치 교황?..

1655년 인노첸시오10세(Innocentius PP. X, 1574~1655, 재위1644~1655)가 81세로 선종하고, 콘클라베(교황선출 선거)개시 8일만에 만장일치로 선출되면서 개혁교황 알렉산데르3세(Alexander PP. III, 1105~1181, 재위1159~1181)의 이름을 따서,  237대 교황 알렉산데르7세(Alexander PP. VII,  1599~1667,  재위 1655~1667)로 즉위하게 됨.

즉위당시엔 가족, 친척들 관리를 잘 한 교황으로 알려져있는데, 매우 검소하게 살며 일가친척들이 로마로 방문하는 것 자체도 허락하지 않을정도. 라고 생각했지만 즉위1년만에 그 관리가 무너지고 교황령에 속한 행정주요요직은 일가친척들이 독차지했고, 족벌주의(친족중용주의)가 가장 깊었음.

 

교황으로서

카톨릭 교리에 부합하지않는 부분을 제거, 대학설립, 성직자가 되는데 필요한 요구조건 강화, 사도단 폐지, 암행 추기경등이 이때 만들어짐. 도시 재개발에서도 명성이 있는데, 성당건설, 광장조성, 공연장 또는 극장등을 랜드마크화 시키는 작업을 했다고 보면 됨. 이때 만들어진 것이 콜론나 광장, 코르소 거리,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 교황청 내 장식물, 교황청 바깥 구조물 장식물등의 재시공까지 시행하게 됨.


제사? 오케이

1656년, 청나라의 전통의례에 맞춰 청나라의 카톨릭신자가 참가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는데, 계속해서 요구가 들어왔던 청나라 내 예수회 선교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내린조치라고는 하지만, 당시에는 엄청 파격적인 조치라 말이 많았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순치제(1638~1661, 재위1643~1661)였는데, 당시 독일출신 선교인 아담 샬 폰 벨( Johann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을 만나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언을 청하는 사이였다고 하며, 수도 북경에 로마 고딕양식의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허가한 군주이기도 함.  그리하여, 중국에서도 카톨릭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

그러나 이후 교황 클레멘스11세(Clemens PP. XI, 1649~1721, 재위1700~1721)에 의해서 청나라의 제사문화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려 혼란이 발생하게 되면서, 이후 청나라에서도 천주교 선교활동 금지, 조선에서도 여러 박해들이 발생하게 되면서 많은 피를 흘리게 된다.

 

선종

1667년 68세로 선종하게 되는데, 족벌주의가 가장 강했던 교황으로서도, 다양한 문화재, 정비, 건설등으로 인해 명암이 확실하게 나뉘는 교황으로 꼽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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