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ellus PP. II, 1501~1555, 재위1555
출생
1501년 교황령 마체라타 주 몬테파노(Montefano)에서 교황청 회계원인 아버지 리카르도 체르비니(Riccardo Cervini)와 어머니 카산드라 벤치(Cassandra Benci)사이에서 태어남.
역시 싹들이 달라..
여느 교황들의 유년시기와 비슷하게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등에 능숙하였고 당시의 기초학문(법학, 철학, 수학)교육도 받았고, 신학공부를 한 뒤 사제서품을 받게 됨.
사제
시에나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1535년 사제 서품을 받게 되는데, 이전부터 이미 아버지가 교황 클레멘스7세(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534)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서 서품이전부터 교황청에서 일을 할 수 있었는데 1527년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이 로마약탈을 자행하면서, 마르첼로는 이후 바오로3세(Paulus PP. III, 1468~1549, 재위1534~1549)가 되는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의 집에 의탁하게되면서 도움을 받게 된다.
추기경
파르네세를 의탁해주던 파르네세 추기경이 이후 1534년 클레멘스7세의 선종이후 교황에 선출되자 마르첼로는 교황의 비서가 되면서 조언가로 부상하면서 활동. 대표적으로 당시 1500년대 상남자들의 시대(프랑수아1세, 카를5세, 슐레이만 대제 등등)에서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의 전쟁을 중재하기위해 교황 바오로3세가 직접회담장소로 갈 때 수행비서등을 맡게 된다.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수행하다가 1539년(바오로3세 재위5년)에 사제급 추기경(추기경계급 : 주교급>사제급>부제급)으로 승품된다. 교황의 신임을 얻은 추기경으로서, 공의회 의장등 교황청 주요 행정최고사령탑에 있었다.
1550년 콘클라베
1549년말 교황 바오로3세(Paulus PP. III, 1468~1549, 재위1534~1549)가 선종하면서 새로운 후임교황을 뽑는 콘클라베가 소집되는데, 선거인단은 51명으로 마르첼로역시 후보에 올랐지만, 이전에 카를5세의 황제권과 부딫히면서 왔던지라 강한 반대로 인해 교황으로 선출되지는 못한다. 2달여간의 콘클라베의 결과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Giovanni Maria Ciocchi del Monte)추기경이 당선되면서 제221대 교황 율리오3세(Iulius PP. III, 1487~1555, 재위1550~1555)로 등극.
1555년 콘클라베
1555년초 교황 율리오3세(Iulius PP. III, 1487~1555, 재위1550~1555)가 재위5년만에 선종하면서, 다시 콘클라베가 열리게 되는데, 당시까지도 살아있던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의 세력이 많이 남아있던지라 마르첼로의 어려움이 예상되었지만, 이런 방해에도 유력한 후보가 되는데 거의 몰표에 가까운 투표를 받고 당선이되면서 마르첼로2세(Marcellus PP. II, 1501~1555, 재위1555)로서 제222대 교황에 등극.
청렴한 교황
자신의 본명을 사용한 처음이자 마지막 교황으로서, 교황선출이후 대관식을 치르는 과정에서도 청렴한 성품때문인지, 의식자체를 간소화시키고 화려하지 않게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른 선종
그러나 몸을 아끼지 않으면서 교황청의 국정을 다시리고 외부 고위인사들을 접견하면서 휴식하지 않은탓인지,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보통때처럼 잠드는데 뇌줄중이 와버리는바람에 혼수상태에 빠지고 당일에 바로 선종..
교황에 선출된지22일만인데, 이 기간만 보면 역대로 짧은 재위기간이 아닐까 싶지만 놀랍게도 역대 6번째로 재위기간이 짧은 교황이다.
교황들중 제일 재위기간이 짧은 교황은 우르바노7세(Urbanus PP. VII, 1521~1590, 재위1590)로서 재위기간이 12일. 재위에 오르자마자 말라리아에 걸려 대관식도 하지못한채 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