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안셀모 다 바지오(Anselmo da Baggio)
156대 교황 알렉산데르2세(Alexander PP. II, 1010~1073, 재위1061~1073)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155대 교황 | 156대 교황 | 157대 교황 |
출신 | 신성로마제국, 세브롱 | 신성로마제국, 밀라노 | 신성로마제국, 토스카나 후작령 |
명칭 | 니콜라오2세 Nicolaus. PP |
알렉산데르2세 Alexander PP. II |
그레고리오7세 Gregorius PP. VII |
생몰년도 | 990.xx.xx ~ 1061.07.19 | 1010.xx.xx ~ 1073.04.21 | 1020.xx.xx ~ 1085.05.25 |
교황선거 | 추대 방식 | 1일 (1061.09.30) |
1일 (1073.04.22) |
재위 | 1058.12.06 ~ 1061.07.19 | 1061.09.30 ~ 1073.04.21 | 1073.04.22 ~ 1085.05.25 |
출생
1010년, 신성로마제국 밀라노(Milano)에서 아버지(미상)와 어머니(미상)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56대 교황으로, 강력하게 성직매매를 반대하고 성직자 독신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고 즉위 초기 대립교황 호노리오2세와 3년간 대립하다가 1064년 공의회를 통해 정통 교황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대립교황을 파문시키고 안정화를 찾게 된다. 1066년 잉글랜드 왕 해럴드2세를 향해 칼을 들이민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을 지지하였고, 1069년에 로마왕 하인리히4세가 왕비 사보이의 베르타와의 이혼을 요청할 때 이혼을 허락하지 않고, 1070년 밀라노 대주교 임명권을 두고 대립이 격화되면서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7세때까지 대립을 이어간다.
성직
밀라노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어린 시절 프랑스 베네딕토회 수도원인 베크(Bec)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 과정을 거치고 란프랑코(Lanfranco) 클뤼니 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고 1055년, 사제로 서품된다. 2년 뒤 주교 서품과 동시에 루카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대주교나 추기경 서품은 받지 않은 채 1061년 교황 선거까지 직위를 유지하며 주교 재직 시절부터 강조한 성직매매 금지와 성직자 독신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1061년 교황 선거
1061년 7월 27일, 교황 니콜라오2세(Nicolaus PP. II, 990~1061, 재위1058~1061)가 선종하면서 교황 선거가 소집된다.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서 치뤄진 교황 선거는 당시 교황 선출을 방해하고자 했던 세력들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해 추기경들의 후원세력인 귀족들도 선거 때 배석된다. 당시 안셀모 주교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로 제후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인물로 교황으로 선출되는데, 당시 교황 선거는 신성로마황제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는 논란에 불만을 가진 로마 귀족들이 피에트로 카달로(Pietro Cadalo)주교를 바젤 공의회에서 선출하여 대립교황 호노리오2세(Antipope Honorio II, 1010~1072, 대립교황1061~1072)로 선출시킨다. 대립교황 호노리오2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와서 알렉산데르2세의 군대를 격파하여 1062년 4월, 교황청 주변을 모두 점거해버리고 알렉산데르2세는 로마를 떠나 피신한다. 이런 사태에 1062년 10월 아우크스부르크 공의회를 소집시킨 섭정인 쾰른 대주교 안노2세(Anno II, 1010~1075)는 할버슈타트 주교 부르하르트2세(Burchard II, 1028~1088)를 로마에 사절로 파견시켜 교황 알렉산데르2세를 교황으로 인정하면서 1063년 알렉산데르2세는 자신에게 대항했던 대립교황 호노리오2세를 파문시키고 서로 대립을 이어가다가 1064년 5월, 만토바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대립교황을 재파문함과 동시에 알렉산데르2세를 합법 교황으로 선포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된다.
교황
I. 친족 계산 방식 전환
당시 유럽은 친족 분류 방식을 로마 제국 시스템을 따르던 것을 기초로 하여 그 방식이 이어져오고 있었는데, 알렉산데르2세는 기존의 로마 제국 시스템 방식을 게르만족 시스템으로 전환을 시도한다. 이는 로마 제국 시스템은 직계 혈통에 기반을 둔 계산법을, 게르만족 시스템은 방계 혈통에 기반을 둔 계산법을 따르면서 기존의 단계방식보다 훨씬 느슨해진 계산법으로 친족계산을 기반으로 한 결혼을 승인하고 금지하는 방식을 결정한다(예를 들어 14촌까지 결혼이 불가한 시스템이 7촌정도까지 기준이 완화된).
II. 바르바스트로 십자군
1063년, 알렉산데르2세는 아라곤 지방인 바르바스트로를 점령한 무슬림 국가 라리다 토후국을 점령해달라는 것을 유럽의 카톨릭 군주들에게 호소한다. 레콩키스타를 비상사태로 규정한 알렉산데르2세는 군주들에게 호소한 끝에 1064년 병력을 모아 바르바스트로 포위전을 실시하게 된다. 노르만족, 프랑스인, 카탈루냐, 아라곤인등으로 구성된 십자군은 포위전 첫 전개 당시 협상을 통해 바르바스트로를 점거한 무슬림들에게 생명을 보장하고 재산권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는 걸 요구하였는데, 이에 순응한 바르바스트로 무슬림들은 조약을 깨버린 십자군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도시가 방화, 약탈당하기에 이른다.
III. 외교
당시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 해럴드2세(Harold II, 1022~1066, 재위1066)에 맞설 때 교황은 윌리엄 편을 들어 이후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고 난 뒤 직접 교황 사절을 보내 윌리엄1세의 왕관을 씌우게끔 한다. 교황의 지지를 받는 윌리엄1세는 당시 교황 대사들을 통해 자신의 지지파인 성직자들을 대주교등으로 임명하는 등 든든한 뒷배가 되기도한다. 그러나 1069년, 신성로마제국에서는 16세의 어린 로마왕 하인리히4세(Heinrich IV, 1050~1106, 로마왕재위1053~1105, 신성로마황제1056~1105)가 3년전 1066년 결혼했던 사보이의 베르타(Bertha of Savoy, 1051~1087)와 이혼하고 싶다는 뜻을 교황에게 비추는데, 알렉산데르2세는 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게 되면서 마지못해 베르타와 화해하는데, 1070년에 밀라노 대주교가 선종하면서 하인리히4세가 직접 임명하려던 대주교를 알렉산데르2세가 다른 대주교를 자신이 임명한 것에 불만과 분노를 품어 대립하기 시작하는데 이 대립은 이후 후임 교황이 되는 그레고리오7세(Gregorius PP. VII, 1020~1085, 재위1073~1085)대까지 이어진다.
선종
알렉산데르2세는 1073년 4월 21일, 63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