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101대~200대 교황

그레고리오7세

Mintaka5 2025. 7. 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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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일데브란도 디 소아나(Ildebrando di Soana)

157대 교황 그레고리오7세(Gregorius PP. VII, 1015~1085, 재위1073~1085)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156대 교황 157대 교황 158대 교황
출신 신성로마제국, 밀라노 신성로마제국, 토스카나 후작령 베네벤토 공국, 베네벤토
명칭 알렉산데르2세
Alexander PP. II
그레고리오7세
Gregorius PP. VII
빅토르3세
Victor PP. III
생몰년도 1010.xx.xx ~ 1073.04.21 1020.xx.xx ~ 1085.05.25 1027.xx.xx ~ 1085.05.25
교황선거 1일
(1061.09.30)
1일
(1073.04.22)
1일
(1086.05.24)
재위 1061.09.30 ~ 1073.04.21 1073.04.22 ~ 1085.05.25 1086.05.24 ~ 1087.09.16

그레고리오7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020년, 신성로마제국 토스카나 후작령에서 아버지(미상)와 어머니(미상)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57대 교황으로, 교황으로 즉위하기 이전부터 교황령 전반의 재정과 행정전반을 담당하며 부패한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4세와 주교 서임권 분쟁으로 인해 부딫히다가 제국 내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하인리히4세가 직접 교황이 머물고 있던 카노사로 찾아가 용서를 빌고 파문철회를 요청했던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교황이다. 교황으로 즉위할때부터 이전의 개혁을 더욱 강화시켜 성직자 독신주의, 성직매매 금지등을 강조했던 인물이다. 

 

성직

클뤼니 수도원장이였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 어린시절 삼촌이 있던 로마로 가서 공부를 했다고 전해지며 이곳에서 요하네스 그라티아누스(미래의 교황 그레고리오6세)와 로렌초 다말피(Lorenzo d'Amalfi, ?~1050)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1048년 스승이였던 교황 그레고리오6세(Gregorius PP. VI, 1000~1047, 재위1045~1046)가 선종하였을 시기 클뤼니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곳에서 수사로서 수련과정을 거쳤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교황 레오9세로 선출되는 브루노 폰 에기 샤임-다그스부르크 추기경을 로마로 동행하는 일원중 한명이였고, 로마에 도착하여 착좌한 레오9세에 의해 부제로 서품되고 교황청 행정관으로 임명된다. 이 직책을 맡을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사실상 교황령의 재정과 더불어 행정전반에 걸쳐 일데브란도에 의해 돌아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였고, 레오9세 이후로도 줄곧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일부 사람들은 교황령 자체 개혁의 주도역할을 하는 주역중 한명으로 간주하여 일데브란도가 행해왔던 20여년간의 개혁을 '그레고리오 개혁'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이후 교황 특사로서 10년안되는 기간동안 활동하며 중재를 담당하였고, 1059년 3월 교황 니콜라오2세(Nicolaus PP. II, 990~1061, 재위1058~1061)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된다. 

 

1073년 교황 선거

1073년 4월 21일, 교황 알렉산데르2세(Alexander PP. II, 1010~1073, 재위1061~1073)가 선종하여 교황 선거가 소집된다. 알렉산데르2세가 선종한 다음날인 4월 22일 라테란 대성당에서 총7명의 추기경 선거인단 중 2명의 추기경이 불참하고 5명이 참여하는데, 일데브란도 디 소아나 추기경이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어 그레고리오7세로 명명하게 된다. 

 

 

교황

그레고리오7세는 교황 선출 이전부터 오랜기간 교황령에서 재정, 행정전반을 맡아본 경험과 개혁적 성향으로 즉위 한 이후로도 개혁을 지속한다. 주된 개혁은 성직자들의 독신주의 강조(결혼한 성직자 허용하지 않음)와 성직매매 금지, 영적 권력을 유지하기위한 민간 주교 서임권(군주가 주교를 서임하는 것)을 반대한다. 특히 그레고리오7세는 12년의 치세동안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4세(Heinrich IV, 1050~1106, 로마왕재위1053~1105, 신성로마재위1056~1105)와 격렬한 대립을 하게 된다. 

 

I. 성직자 독신주의

그레고리오7세의 첫번째 개혁안은 성직자들이 결혼하거나 이중으로 첩을 두는 관행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성직자들의 독신제를 강요한다. 독신을 유지한 성직자만이 이상적인 카톨릭인의 가치로 여겨 오롯이 혼자만으로서 주변 유대감으로 인한 걸림 없이 사목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1075년 사순절에 열린 시노드에서 공개적으로 성직자 독신주의를 부르짖으며 이를 지키지 않은 성직자들은 사제직에서 면직되며 모든 교회적 혜택을 박탈당해야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성직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여 특히 신성로마제국 내 주교들의 반감을 사서 교황 특사와 신성로마제국 주교들간에 마찰이 일어나면서 황제 하인리히4세가 직접 중재하며 진정시키기도 한다. 신성로마제국 뿐만 아니라 스페인과 프랑스, 잉글랜드등에서도 마찰이 벌어지면서 상황이 안정되고 받아들이기까지 50~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리게 된다. 

 

II. 주교 서임권으로 인한 하인리히4세와의 대립

그레고리오7세는 영적 권력과 세속적 권력을 분리시켜 확실하게 카톨릭 교회의 독립성을 가지고자 하여 영적 권력의 수장인 교황만이 영적 직위인 주교직을 서임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세속적 권력의 수장인 황제는 주교 서임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때마침 신성로마제국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황제 하인리히3세(Heinrich III, 1016~1056, 로마왕재위1028~1056, 신성로마재위1046~1056)이후 제국 내적으로 반란과 권위 상실등으로 추락하고 있던 시점이였는데 교황은 이러한 상황을 통해 신성로마황제가 행사하던 주교 서임권을 완전히 교황령으로 환수시켜 오로지 성직자들만이 주교를 임명할 수 있게끔 시도하였다. 1075년 로마에서 사순절 시노드를 통해 그레고리오7세는 세속적 권력을 가진 인물이 주교를 서임하는 것을 죄악이라 규정하고 만약 이를 지키지 않았을 시 파문을 당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교황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황제 하인리히4세는 이후로도 주교를 임명하면서 그레고리오7세는 1075년 12월,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사실상 최후 통첩을 날리지만 이럼에도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076년 결국 하인리히4세를 파문함으로서 대응한다. 그레고리오7세의 계산은 정확하게 적중하였는데, 특히 파문당하기 전부터 신성로마제국 내적으로 황제에 반기를 들어 반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황제가 파문당하자마자 제국 내 수많은 제후들이 합심하여 황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하인리히4세를 위기에 봉착시키게 한다. 

 

III. 카노사의 굴욕

그렇게 위기에 봉착한 하인리히4세는 제국 내에서 반란이 터지면서 막을 길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교황 그레고리오7세를 직접 알현하여 용서를 구하고 파문철회를 요청하기 위해 로마로 직접 향한다. 그러나 교황은 황제 하인리히4세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로마에서 카노사(Canossa)성으로 대피한다. 그러나 소식통을 통해 황제가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러 오고있다는 것을 듣고, 1077년 1월 25일 황제가 카노사 성에 도착하였을 때 교황 그레고리오7세는 성문을 절대 열어주지 말라는 지시를 하고 그렇게 3일동안 카노사 성 바깥에서 하인리히4세는 용서를 계속 구하면서 결국 교황이 문을 열게하고 황제가 교황을 알현하여 용서를 받고 파문을을 해제하게 된다. 이 사건은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확실하게 우위에 위치하게된 상징적인 사건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그러나 파문 철회에 반발한 신성로마제국 제후들은 황제 하인리히4세에 반하는 대립왕 슈바벤 공작 루돌프(Rudolf of Rheinfelden, 1025~1080, 재위1057~1079)를 로마왕으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카노사에서 복귀한 황제 하인리히4세는 즉시 이들의 영지를 몰수하게 되면서 새로운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마침 용서해주자마자 다시 교황의 뜻을 거역하던 하인리히4세가 못마땅하던 교황 그레고리오7세는 이러한 내전 상황에 대립왕 루돌프를 새로운 로마왕으로 공식 승인하면서 다시 황제 하인리히4세를 재파문하지만, 황제군과 루돌프군대가 부딫힌 전투에서 루돌프가 손이 잘리고 다음날 사망하고 마는데 이를 신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 믿은 제국 내 제후들과 국민들에게 퍼지면서 사기가 저하된 반군들은 자연스럽게 붕괴해버리고 말면서 황제 하인리히4세는 제국 내적으로 안정화에 성공한다. 그렇게 내적으로 안정을 찾은 하인리히4세는 1080년 12월부터 이탈리아 반도 원정을 천명하고 토스카나를 폐퇴시키고 1084년 3월에는 로마까지 점령하고 만다. 로마를 점령한 하인리히4세는 라벤나의 귀베르토(Guiberto of Ravenna)를 대립교황 클레멘스3세(Antipope Clemens III, 1029~1100, 대립교황1080~1100)를 옹립시키고 대립교황으로 하여금 황제 대관식을 올리게 한다. 

 

IV. 로마 약탈

그레고리오7세는 1084년 3월, 로마가 황제 하인리히4세의 수중에 넘어가면서 산탄젤로(Sant'Angelo)성으로 피신한 다음 이탈리아 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노르만 군주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 1015~1085)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교황을 도우러 오게되면서 장기간 원정을 나와있던 하인리히4세의 황제군은 지쳐있던 상태라 노르만 연합군을 이겨낼 재간이 없어 신성로마제국으로 퇴각시킨다. 그렇게 교황을 도우러 로마에 입성하게 된 노르만 군은 교황 그레고리오7세를 구출하는데 성공하지만, 로마 내에 방화와 약탈을 수일간 자행하게 되면서 분노에 가득찬 로마 시민들이 일을 터뜨릴 기세에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구출되자마자 교황은 다시 로마를 떠나 살레르노로 가게 된다. 

 

선종

1085년 5월 25일, 교황 그레고리오7세는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살레르노 성에서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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