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브루노 폰 에기 샤임-다그스부르크(Bruno von Egisheim-Dagsburg)
152대 교황 레오9세(Leo PP. IX, 1002~1054, 재위1049~1054)
|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 직위 | 151대 교황 | 152대 교황 | 153대 교황 |
| 출신 | 신성로마제국, 바이에른 | 신성로마제국, 오베르뉴 | 신성로마제국, 슈바벤 |
| 명칭 | 다마소2세 Damasus PP. II |
레오9세 Leo PP. IX |
빅토르2세 Victor PP. II |
| 생몰년도 | 1000.xx.xx ~ 1048.08.09 | 1002.06.21 ~ 1054.04.19 | 1018.xx.xx ~ 1057.07.28 |
| 교황선출 | 1047.12.25 | 1048.12.xx | 1054.09.xx |
| 재위 | 1048.07.17 ~ 1048.08.09 | 1049.02.12 ~ 1054.04.19 | 1055.04.13 ~ 1057.07.28 |

출생
1002년 6월 21일, 신성로마제국 오베르뉴(Auvergne, 현 프랑스 중남부 레지옹 오베르뉴)에서 아버지 노르드가우 백작 위그4세(Hugues IV de Nordgau, 970~1048, 재위1027~1048)와 어머니 다보의 헤일위그(Heilwige de Dabo, 980~1046)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52대 교황으로, 1048년 다마소2세 선종이후 열린 후임 교황 선거 회의에서 교황으로 지명받고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3세와 주교단의 동의가 있었지만 교회법상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즉위하길 거부하여 로마에 직접 가서 로마 시민들과 성직자들의 열렬한 환영과 더불어 지지를 받아 교황직을 수락하여 교황이 되는 인물이다. 즉위 이후 매년 부활절에 시노드를 개최하여 강력한 자신의 의지였던 성직자 독신주의와 성직매매 반대를 설포하고, 재위기간 대부분을 유럽 내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사목 활동을 펼친 교황으로서 유명하다. 그러나 1053년 6월,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약탈을 일삼던 노르만 무리들을 토벌하러 직접 나섰다가 치비타테(Civitate)에서 대패하고 9개월(1053.06~1054.03)간 베네벤토에 억류당하기도 한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하일1세 키룰라리오스와 대립하여 서로 파문을 날리는등 재위기간 내 시끄러운 날들이 많았다.
성직
로렌에서 성직 교육을 받고 참사회원(캐논)이 된 다음 1026년 144대 교황 요한19세(Ioannes PP. XIX, 975~1032, 재위1024~1032)로부터 주교에 봉헌되었으며 교황 대사로서 신성로마황제 콘라트2세(Konrad II, 990~1039, 프랑크왕재위1024~1039, 신성로마재위1027~1039)와 하인리히3세(Heinrich III, 1016~1056, 로마왕재위1028~1056, 신성로마재위1046~1056)등에게 중요한 정치적 공헌과 더불어 교황과 황제사이의 가교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평을 받아 추기경에 서임된다.
교황 선출
1048년 8월 9일, 교황 다마소2세(Damasus PP. II, 1000~1048, 재위1048)가 선종한다. 선종 이후 4개월간의 주교좌 공석시기를 거쳐 그해 12월에 보름스(Worms)에서 후임교황 선출에 대한 회의가 소집되게 된다.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3와 로마에서 온 사절단 모두 브루노 폰 에기 샤임-다그스부르크 추기경을 교황으로 지명하고 후임 교황이 되는 것에 모두 동의하는데, 정작 브루노 자신은 이런 회의로 추천을 받는 교회법에 어긋나는 교황선출 방식보다 교회법에 의거한 선출방식을 통해 선출되는 것을 원하였고, 이러한 의지로 크리스마스 다음날 로마에 도착해 환영을 받고 자신이 원했던 것 처럼 로마 시민, 로마 교구 성직자들의 열렬한 지지와 요청에 따라 비로소 교황직을 수락하게 되어 레오9세로 명명하고 교황이 된다.
교황
I. 사목활동과 시노드, 공의회
레오9세는 교황으로 즉위하자마자 부활절에 시노드를 소집하는 것으로 공식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 시노드를 통해 성직자 독신주의를 재차 강조하였고 또한 성직위 매매 반대를 강력하게 표명함으로서 교회 내적 기강을 바로잡고고, 즉위 원년 초장에 성직자들의 기강을 잡는다. 5년의 재위기간중 대부분의 시간을 유럽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사목 활동을 하는 것에 투자한다. 각 국가 도시별로 성직자들과 만남의 자리를 매번 가지면서 자신이 시노드에서 직접 강조한 내용을 토대로 의지를 전파하고 교회 쇄신을 위한 성직자회의를 매번 열어 의견을 경청하고자 하였다. 또한 마인츠(Mainz)에서 공의회를 열어 서방교회뿐만아니라 동로마제국의 동방교회 성직자, 대사들을 참석시켜 이전 시노드에서 언급했던 성직자 독신주의, 성직매매 금지등을 강조하며 이를 참석자들과 함께 토론한다. 레오9세는 특히 1050년 부활절 시노드에서 투르의 베렝가리오(Berengar of Tours, ?~1088)가 설포한 잘못된 교리 주장에 대한 논쟁을 주 쟁점으로 삼아 문제 해결방안을 모색한다.
II.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 포로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3세가 점점 시노드에서 밝힌 뜻과 반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레오9세는 점점 황제를 신뢰하지 못하고 동방 제국인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과 동맹을 맺게 된다. 특히 교황령 남쪽을 점령하고 터를 잡은 다음 노략질과 약탈을 일삼던 노르만족의 행태를 더는 두고볼 수 없던 교황 레오9세는 이탈리아 북부 랑고바르드, 로렌 공국등과 연합 군대를 조직하여 이탈리아 남부 노르만족을 축출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하게 된다. 1053년 부활절 시노드가 끝난 직후 교황 레오9세는 직접 연합 군대를 이끌고 남부 이탈리아로 출병한다. 카톨릭 교도들이였던 노르만족은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인 교황이 군대를 이끌고 싸우자고 하는 것을 상당히 꺼려해 여러차례 경의를 표시하고 협상을 통해 전투를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은 전투가 벌어지고 1053년 6월 15일 남부 치비타테(Civitate)에서 교황군이 대패하고 요새에서 농성을 벌이다가 교황이 직접 노르만군에게 항복의사를 밝히게 된다. 비록 포로가 된 교황 레오9세였지만 노르만인들은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를 최대한 예우하여 베네벤토(Benevento)에 9개월간(1053.06~1054.03)억류시키는 것으로 끝낸다. 당시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하일1세 키룰라리오스(Michael I Cerularius, 1000~1059, 총대주교1043~1058)가 관할하던 남부 이탈리아를 서방 교회로 흡수 회복하고 첫 서방교회 수장이 임명한 대주교 움베르토 디 실바 칸디다(Umberto di Silva Candida, 1000~1061)를 팔레르모(Palermo)에 임명시키려 하지만 서방 교회의 라틴식 전례방식에 열렬히 반대를 외치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반발하고 관할 내 서방 교회를 모두 폐쇄시켜버린다. 이러한 움직임에 베네벤토에 포로로 잡혀있던 레오9세는 1054년 1월, 교황 특사들을 보내 중재를 시키고자 한다.
선종 이후 카톨릭과 정교회 뜻의 탄생
1054년 3월, 베네벤토에서 포로로 잡혀있다가 겨우 로마로 돌아오지만 불과 1개월 뒤인 1054년 4월 19일, 52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선종당시 자신이 1월에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던 교황 대사가 동로마황제 콘스탄티노스9세 모노마코스(Constantine IX Monomachos, 1000~1055, 재위1042~1055)의 영접을 받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하일은 꿈쩍도 않고 교황 대사를 상대해주지도 않는다. 그렇게 콘스탄티노플에서 3개월이나 기다린 끝에 교황 특사들은 총대주교 미하일과 측근 성직자들을 파문시켜버린다. 쿨하게 파문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을 떠난 교황 특사들은 떠난지 이틀이 지나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하일이 동시에 레오9세를 포함한 측근을 똑같이 파문시키면서 갈등이 극대화 되다가, 이후 후임 교황이 되는 빅토르2세(Victor PP. II, 1018~1057, 재위1055~1057)대에 들어 화해를 시도하게 되면서 서방 교회는 카톨릭이라 칭하게 되고 동방 교회는 정교회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