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군주(927~1707), 고위귀족/플랜테저넷 왕조

헨리3세

Mintaka5 2025. 6. 4.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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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 왕 헨리3세(Henry III, 1207~1272, 재위1216~1272)

  전임 군주 당시 재직 군주 후임 군주
직위 노르망디&아키텐 공작, 잉글랜드 왕 아키텐 공작, 잉글랜드 왕 아키텐 공작, 잉글랜드 왕
가문 플랜태저넷 플랜태저넷 플랜태저넷
명칭
John
헨리3세
Henry III
에드워드1세
Edward I
출신 잉글랜드, 옥스퍼드
(버몬트 성)
잉글랜드, 햄프셔
(윈체스터 성)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
생몰년도 1166.12.24 ~ 1216.10.19 1207.10.01 ~ 1272.11.16 1239.06.17 ~ 1307.07.07
재위 노르망디 공작
1199.05.27 ~ 1204.04.28
아키텐 공작, 잉글랜드 왕
1216.10.28 ~ 1272.11.16
아키텐 공작
1272.11.16 ~ 1306.04.07
아키텐 공작
1199.05.27 ~ 1216.10.19
잉글랜드 왕
1272.11.16 ~ 1307.07.07
잉글랜드 왕
1199.05.27 ~ 1216.10.19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 군주 헨리3세 그림
헨리3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207년 10월 1일, 잉글랜드 햄프셔(Hampshire) 윈체스터 성에서 아버지 존(John, 1166~1216, 재위1199~1216)과 어머니 이사벨 당굴렘(Isabelle d'Angoulême, 1188~1246)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 군주로, 1215년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로 권위가 떨어진 잉글랜드 왕 존의 적장남이다. 현실적인 감각이 부족하고 독단적인 결단과 행보로 인해 무능함이 드러나 '옥스퍼드 조례'를 통해 왕의 권위가 축소되면서 헨리3세 찬성파 반대파로 갈라져 반대파 수장이 된 매제 시몽 드 몽포르 백작과 수년간 내전을 겪고 1264년 패하여 1년간 시몽 드 몽포르를 중심으로 의회정치가 발전하게 되어 잉글랜드 정치역사가 발전하기도 하지만, 1265년 미래의 에드워드1세가 되는 아들 에드워드가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를 무찌르고 전사시킴으로서 복위하나 별 다른 업적없이 생활하다 1272년 사망한다.

 

초년

어린시절 윈체스터 주교 피터 데 로슈()로부터 교육을 받고 필립 도비니()에게 군사 훈련을 받는등 적장자로서 교육을 받는데, 1215년 아버지 존 왕이 귀족들과의 분쟁에서 사실상 패배하고 평화조약의 대가로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 스스로 서명함에 따라 사실상 허수아비 왕이 됨에 따라 존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귀족들이 대헌장을 거부하면서 프랑스 왕 필리프2세(Philippe II Auguste, 1165~1223, 재위1180~1223)의 아들 루이(미래의 루이8세, 존 왕의 외조카)의 도움까지 받아(루이의 아버지 필리프2세와 교황 인노첸시오3세는 반대를 표명함) 반기를 들면서 제1차 남작 전쟁(The first Barons' war, 1215~1217)이 발발하지만, 루이는 출정 후 잉글랜드 땅 절반이상을 차지하면서 귀족들로부터 왕으로 선포되지만 대관식을 치르지는 못한다. 이 이후 루이는 교황 인노첸시오3세(Innocentius PP. III, 1160~1216, 재위1198~1216)에게 파문당하고 존 왕이 1216년 10월 19일 승하하자마자 루이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잉글랜드 귀족들은 루이를 바로 배신하고 존 왕의 장남 헨리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루이와 대적하게 되는데, 루이는 아내 블랑쉬 드 카스티야(Blanche de Castille, 1188~1252)로부터 병력을 증원받으려 했으나, 1217년 8월 24일 패배하면서 램버스 조약(The treaty of Lambeth, 1217)에 서명하면서 잉글랜드 왕이 아님을 인정하고 프랑스로 철수하게 된다.

 

즉위

1216년 10월 19일 즉위한 헨리3세의 나이는 불과 9살이였는데, 아버지 존 왕이 사망하기 직전 아들 헨리로 하여금 13명의 섭정 위원을 임명시켜놓고, 무장 윌리엄 마셜()의 든든한 보호아래 통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놓는다. 10월 28일 헨리3세는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른 뒤 당장에 맞닿은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는데, 아버지 존 왕대에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빼앗겼기 때문이였고, 즉위를 한 뒤에도 지속된 제1차 남작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왕자 루이(미래의 루이8세)까지 왕위를 주장하면서 혼란스러웠지만 다행이도 교황 호노리오3세()와 잉글랜드 교회가 헨리3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1217년 8월 24일 램버스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료되면서 안정을 찾는다. 내전이 끝나자마자 헨리3세를 보좌하던 섭정들은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는 작업에 착수하지만 이미 이전부터 귀족들이 군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영지의 단독통치를 행해온 것이 오래라, 중앙집권화가 될 수 없었고 거기다 든든한 섭정 위원이였던 헨리3세의 어머니 이사벨 당굴렘이 1217년 고향 프랑스로 돌아가서 푸아투 백작 위그10세()와 재혼해버리고, 든든한 무장이였던 윌리엄 마셜마저 1219년 사망해버리면서 새로이 임명된 3명의 후견인이 삼두정치를 통해 권력다툼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3명의 후견인은 아래 표와 같다.

  생몰 년도  비고
판둘프 베라치오
Pandulf Verraccio
? ~ 1226.09.16 교황 특사, 노리치 주교
피터 데 로슈
Peter des Roches
? ~ 1238.06.09 윈체스터 주교
휴버트 드 버그
Hubert de Burgh
1170.xx.xx ~ 1243.05.05 대법원장, 켄트 백작

피터 데 로슈와 휴버트 드 버그는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관계였는데, 이후 휴버트가 피터를 1221년 반역죄로 고발하여 후견인 지위를 박탈하였고, 판둘프 베라치오 주교는 십자군 원정관련 업무로 인해 교황 호노리오3세의 부름을 받고 1222년 잉글랜드를 떠나게 되면서 사실상 휴버트가 사실상 단독 섭정이 된다. 그리고 헨리3세의 왕권 회복차원에서 교황 호노리오3세(Honorius PP. III, 1148~1227, 재위1216~1227)는 2번째 대관식을 치르게끔 허용하면서 1220년 5월 17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2번째 대관식을 거행하여 왕의 권위를 재확인시키게 된다.

 

 

재혼란

그러나, 휴버트의 단독 섭정 통치를 질시한 귀족들이 새로운 내전을 일으키려 하였다가 어린 헨리3세를 지키려는 교황 호노리오3세가 내전을 일으키려는 귀족들에게 내전을 일으킬 시 파문해버리겠다는 위협을 가하면서 내전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참지못하고 대항하던 귀족들의 리더였던 팔케스 드 브레오테(Sir Falkes de Breaute, ?~1226)는 베드포드 성에서 포위 공격을 8주동안 받으면서 결국 항복하면서 굴복하고 팔케스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그러나 1223년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루이8세(Louis VIII, 1187~1226, 재위1223~1226)는 헨리3세의 어머니가 재혼한 상대인 위그10세 드 뤼지냥(Hugues X de Lusignan, 1182~1249)과 동맹을 맺어 아키텐 공국을 침공한다. 그러나 오랜기간 잉글랜드의 혼란속에서 아키텐 공국은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고 금방 프랑스군에 의해 함락당해버려 1225년 잉글랜드 의회에서 즉시 군대 파견과 동시에 물자 지원을 긴급 승인하여 군대를 보낸다음 프랑스군을 물리치면서 다시 아키텐 공국을 되찾게 된다. 

 

친정

헨리3세는 20살이 되던 해인 1227년 1월 공식적으로 친정을 선포하면서 섭정 대신으로서 공로가 컸던 휴버트 드 버그에게 켄트 백작 칭호를 부여함과 동시에 영지를 하사함으로서 노고를 치하한다. 헨리3세가 친정을 시작하기 한해 전인 1226년 11월 8일 십자군 전쟁 도중 승하하면서 12살에 불과하던 루이9세(Louis IX, 1214~1270, 재위1226~1270)가 즉위하는데 어린나이로 인해 어머니 블랑쉬 드 카스티야(Blanche de Castille, 1188~1252)가 섭정을 맡게 되고, 이후 루이9세가 친정을 시작할때까지 계속해서 두 군주간 충돌이 계속 이어진다. 아버지 존 왕때 극렬하게 대립했던 의회는 헨리3세 친정이후 정기적으로 계속 열리는데 주로 세금문제로 열린경우가 대부분이였고 세금 대부분이 왕실 수입으로 연결되는 것에 따라 잉글랜드 국민 개개인에 대한 단일 부과금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원활히 전달하기 위해 국민대표를 의회에 참석시켜서 논의하게끔 된다. 

헨리3세는 특히 신실한 카톨릭 신앙심을 가졌던 것으로 유명했는데, 국민들에게 미사를 장려하고, 당시 군주로서는 매일 미사를 집전할만큼 신실한 태도를 가짐과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끼니를 제공하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도우는 행보를 보이는데 이는 옆나라 프랑스 성왕 루이9세(Louis IX 'Saint Louis', 1214~1270, 재위1226~1270)역시 헨리3세와 비슷하게 신실한 카톨릭 신앙심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돕고 특히 나병환자들의 발을 씻겨준 일화가 유명할정도로 신실하였기에 헨리3세와 루이9세의 신앙심은 서로 공유되면서 당시 각국 외교관들은 두 왕이 이러한 행위들을 경쟁하듯이 하였다고도 표현하였다.  

 

대내외 공략

I. 푸아투

1241년, 프랑스에서 헨리3세의 새아버지인 백작 위그10세 드 뤼지냥과 푸아투지역 남작들이 프랑스 왕 루이9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헨리3세는 새아버지와 툴루즈 백작 레몽7세(Raymond VII, 1197~1249, 재위1222~1249)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 왕 루이9세와 루이9세의 동생인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Alphonse de Poitiers, 1220~1271, 푸아티에재위1241~1271)의 연합 프랑스군에 대항하지만 1241년 5월 20일 타이부르(Taillebourg)에서 포위당하면서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헨리3세의 동생 콘월 공작 리처드(Richard of Cornwall, 1209~1272)는 프랑스군에 직접 찾아가 공격지연을 목적으로 설득을 시도하면서 시간을 끌게 되면서 이 때를 틈타서 헨리3세는 아키텐 공국 주도 보르도로 도망치게 된다.   

 

II. 십자군

이후 헨리3세는 타이부르 포위이후 프랑스 땅을 침공할 만한 상황이되지 못하여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어지게 되면서 프랑스 왕 루이9세를 견제할 세력이 없어지자 루이9세는 프랑스의 절대자로서 성장을 거듭하게 되면서 헨리3세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2세(Friedrich II, 1197~1250, 재위1220~1250)와 연대하여 프랑스에 대항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게 된다. 특히 당시 13세기 유럽에서는 십자군 원정만큼 유럽의 군주들에게 있어 영광이 따로 없었는데, 프랑스 루이9세는 카톨릭 군주의 표본답게 교황 인노첸시오4세(Innocentius PP. IV, 1195~1254, 재위1243~1254)의 위임을 받아 7차 십자군 원정(The Seventh Crusade, 1248~1254)의 원정군을 주도하는 명예를안고 떠난다. 헨리3세도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적이였던 루이9세와 연대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참여하지는않고 루이9세의 십자군 행보를 지켜보면서 기회를 노릴 수 밖에 없었다. 루이9세가 7차 십자군 원정을 떠난지 2년이 지난 1250년 2월 11일, 이집트 만수라 근처에서 패배하면서 헨리3세는 이때를 노려 교황에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인 레반트로 원정을 떠나겠다고 한다. 헨리3세는 기회를 포착하여 군대를 끌어모으고 왕실 지출을 줄여 최대한 십자군에서 활약하기위한 만반의 준비를 거치고 떠나지만, 1252년 한창 원정을 떠나있을 때 매제였던 시몽 드 몽포르가 아키텐 공국의 귀족들에 대한 강경책으로 불만이 가득찬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카스티야 왕 알폰소10세(Alfonso X de Castilla, 1221~1284, 재위1252~1284)가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에 지원까지 하면서 헨리3세는 십자군 원정에서 잉글랜드로 급히 복귀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새아버지 가문인 프랑스 뤼지냥 가문의 도움을받아 반란을 효과적으로 수습하고 카스티야의 알폰소10세와는 헨리3세의 아들 에드워드(미래의 에드워드1세)와 알폰소10세의 누이 레오노르(Leonor de Castilla, 1241~1290)와 혼인하게 되면서 평화가 회복되고, 루이9세와도 화해를 하게 되지만 십자군 원정으로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면서 잉글랜드 재정에 비상이 걸리게 된다. 

 

시몽 드 몽포르

헨리3세는 1252년 매제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을 제압한 이후 잉글랜드에서 이들을 지속적으로 감시, 견제하면서 재반란이 일어나지 않게끔 조치를 취하는데, 1254년 헨리3세는 교황 인노첸시오4세가 시칠리아를 침공하고자 할 때 교황이 헨리3세에게 침공하고 상황이 좋지 않거나 장기화될 시 군사지원을 약속하는 협약을 맺었는데, 헨리3세가 재정문제를 핑계로 교황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교황 인노첸시오4세는 헨리3세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그제서야 헨리3세가 의회와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는데 이미 이전 1252년 반란으로 귀족들의 불만이 증폭되면서 헨리3세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이 쌓여있던 터에 헨리3세가 이들에게 도리어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하면서 이들은 이때를 노려 '옥스포드 조례'를 헨리3세에게 들이밀고 조례를 통해 헨리3세가 마음대로 정책을 휘두르게 하지 못하게 하고 큰 일이 있을시 귀족과 의회에상의를 하는 쪽으로 만들었지만 헨리3세에 충성하던 귀족들간 세력다툼이 벌어지면서 찬성파와 반대파로 이들은 두개의 파로 쪼개져버린다. 심지어 매제 시몽 드 몽포르 백작은 헨리3세에 반대하던 세력들 중 으뜸이였고 둘은 수년간 분쟁을 겪는데, 1264년 분쟁이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잉글랜드에 내전이 벌어지게 되어버린다. 헨리3세와 에드워드(미래의 에드워드1세)는 같이 출정하여 시몽 드 몽포르를 상대하지만 시몽 드 몽포르의 군이 헨리3세의 군대에 연전연승을 거듭하면서 최종적으로 몽포르의 반란이 성공하여 권력을 쟁취하게 된다. 

 

최후

헨리3세는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해버리고 매제 시몽 드 몽포르와 귀족들이 연합하여 의회에서 자유롭게 정책을 논의하는 정치적 발전을 하게 되면서 안정을 찾는 듯 보였으나, 왕의 권력을 찬탈해 잉글랜드를 통치하는 것에 크게 분개한 헨리3세는 자포자기였으나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는 세력을 규합해 몽포르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1265년 시몽 드 몽포르를 전사시키고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헨리3세가 권위를 되찾게 되지만, 사실상 나이도 들고 이미 자포자기했던 상태에서 통치력이 발휘되지 않으면서 정국은 아들 에드워드가 주도하게 되어 수년간 생활하다가 1272년 11월 16일, 승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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