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ard I 'le lion', 1157~1199, 재위1189~1199
출생
1157년 잉글랜드 옥스퍼드 보몬트성(Chateâu de Beaumont)에서 아버지 헨리2세(Henri II, 1133~1189, 재위1154~1189)와 어머니 알리오노르 다키텐(Aliénor d'Aquitaine, 1122/24~1204)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남.
어린시절 배경
어머니와 알리오노르와 함께 잉글랜드에서 보내고 1165년 앙주공작령 노르망디에 머물고있던 아버지 헨리2세가 둘을 본인이 머무르고 있던 노르망디 주도인 루앙으로 데려옴. 리처드는 알리오노르가 제일 총애하던 애들이였는데 그 결과로 알리오노르가 가지고있던 광활한 아키텐 공국(남한면적 절반이상)의 상속자로 선포되고 푸아티에 백작칭호까지 받는다. 이때 푸아티에에서 형 헨리(Henri le Jeune, 1155~1183, 헨리2세와 공동재위1170~1183)와 같이 머물면서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Wiliam Marshal, 1146~1219)로부터 승마, 검술, 사냥등을 연마하게 된다.
1169년 아키텐 공작 리차드는 프랑스왕 주재 회의에 참석하는데, 당시 프랑스 왕 루이7세(Louis VII, 1120~1180, 재위1137~1180, 어머니 알리오노르의 전남편)에게 첫 인상을 남기게 됨.
청년왕 헨리
1170년 형 헨리(청년왕 헨리, Henri le Jeune, 1155~1183, 헨리2세와 공동재위1170~1183)이 잉글랜드의 왕으로 공동재위가 시작되는데, 아버지가 이미 통치하고있었기 때문에 형식상 왕이라고 봐도 될 것. 리처드는 이때 푸아티에에 있었는데, 1173년에 형 헨리가 헨리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때 리처드와 형 조프리2세(Geoffrey II de Bretagne, 1158~1186)도 같이 합류한다. 이들의 어머니 알리오노르도 같이 반란에 참여하게 되는데, 알리오노르는 루이7세, 플랑드르 백작등의 세력들을 모아서 헨리2세가 머무르고있던 노르망디를 공격하게 됨.
그러나 용맹술에서 따라올자가 없던 헨리2세의 작전에 휘말려 알리오노르를 포로로 잡고, 역으로 헨리2세가 역공을 펼치게 되면서 전의를 상실한 리처드는 아버지에게 항복을 선언. 손이 닳도록 용서를 빌고빌어서 1174년에 두 아들은 직위가 회복됨. 이후 리처드는 아키텐공국을 중심으로 반군을 제압하기위해 1177년 닥스(Dax)와 바욘느(Bayonne)등을 점령.
필리프2세
1180년 루이7세(Louis VII, 1120~1180, 재위1137~1180)이 서거하고 아들인 필리프2세(Philippe II, 1165~1223, 재위1180~1223)가 프랑스 왕이 되면서 리처드와 형제들 사이에선 반목이 생기게 되는데, 필리프2세가 프랑스 영토를 되찾을 명목으로 이들 사이를 갈라놓는 이간계를 썼기 때문(후에 이 이간계로 프랑스영토 거의 대부분을 되찾게 된다). 처음으로 형 헨리가 리처드와 헨리2세에게 오해를해 군대를 일으켜 리처드를 치게 되는데, 이때 위협받게된 리처드가 아버지 찬스를 통해서 진압이 되긴하는데, 이후 심한 압박을 받은 형 헨리는 중병에걸려 1183년 사망.
헨리의 죽음으로 반란이 종식되지만, 이제는 또 형 조프리2세와 존(Jean sans terre, 1166~1216, 재위1199~1216)이 리처드를 동시에 치기시작하는데, 형제들의 싸움에 빡이친 아버지 헨리2세가 1184년 가을에 형제들 모두 잉글랜드로 불러들여서 화해를 시켜서 그나마 무마가 된다. 그러나 리처드는 새삼 억울했기에 1184년 크리스마스가 끝나자마자 형과 동생을 참교육하게 되는데.. 이에 헨리2세가 리처드에게 가지고있는 아키텐 영지를 어머니 엘레오노르에게 다시 넘겨라고 명령을 해버리는데.. 이때는 일단 참고보자 해서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게 됨.
그러나 형 조프리2세가 1186년 시합중 부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갑자기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를 틈타 필리프2세가 기회를 놓치지않고 아키텐을 치러간다. 이때 필리프는 전쟁명분으로 당시 아키텐과 붙어있던 툴루즈 백국 백작 레몽6세(Raymond VI, 1156~1222, 재위1194~1222)를 지원하는 명분으로 출전한 것. 근데 이것도 필리프2세가 갑자기 치고 빠져서 화해를 하자고 하는데 갑자기 또 화해라 당황한 리처드지만 당장에는 전쟁을 할 여력이 되지않아 일단 화해를 하게 되는데, 이때 또 필리프의 이간계로 리처드가 프랑스편에 서게되면서 다같이 아버지인 헨리2세를 향해 칼뿌리를 들이댄다(폐륜).
이때 헨리2세는 진심으로 당황하게 되면서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막내아들 존을 올릴계획을 세우지만 존마저 몰래 리처드편에 서서 아버지에게 대항한다. 이후 프랑스 시농성에서 서거.
즉위
1189년 리처드1세(Richard I, 1157~1199, 재위1189~1199)로서 잉글랜드의 왕좌에 오르고 바로 3차 십자군전쟁(1189~1192)이 터지는데, 이때 같은 편으로서 불편한 사이인 프랑스 필리프2세와 같이 출전을 하게 되는데, 두 라이벌간에 서로 자신이 왕좌를 비운동안에 영토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두려움을 가지고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는데 도저히 불안해서 못버티던 둘은 그곳에서 서로의 영토를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를 하고 십자군에 임하게 됨.
그러나 3차십자군은 대군에도 불구하고, 당시 팔레스타인지역의 패자 살라딘(Saladin, 1138~1193, 재위1174~1193)의 군대에 계속 막히게되는데, 리처드와 살라딘 두 용맹술의 대가들이 충돌하여 좀처럼 승부가 나지않다가, 3년정도 계속 질질끌게 되어 양측 모두 지치게 되면서 평화협정을 시작하면서 1192년 두측 모두 자파조약(Le traité de Jaffa, 1192)을 체결하게 되면서 3차 십자군이 종료가 된다.
아.. 집에 못가는거 아이가?
복귀하는 도중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령 코르푸 섬(현재 그리스 케르키라 섬)에 잠시 머물면서 붙잡히는걸 피하기 위해(이전에 손을 잡았던 레오폴트의 영지내 신하 몬페라트의 콘라트를 살해했음) 변장을 하고 배도 해적선으로 개조하여 이동하게 되는데, 좌초가되버려서 육로로 복귀하게 되지만, 1192년 12월 오스트리아 빈의 한 여관에서 발각되어 체포되어 당시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던 레오폴트 공작(Leopold V, duc d'Autriche, 1157~1194, 재위1177~1194) 공작 앞으로 끌려가고 옥에 갇힘. 이후 리처드는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6세(Henri VI, 1165~1197, 재위1169~1197)에게 넘겨지면서 제국의회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고 이전 혐의들로 인해 기소가 되면서 리처드의 보석금 15만마르크가 선고되는데, 다행이 어머니 알리오노르가 어렵게 모금을 하여 몸값을 마련하여 1194년 리처드는 풀려나게 됨.
물론, 그냥 풀려나는게 아니라 리처드는 하인리히6세에게 연간 5천파운드(무게)의 곡물을 바치기로 하고 제국에 충성의 맹세를 하고나서야 돌아올 수 있게되는데, 이때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의 필리프2세는 리처드의 동생 존에게 편지로 "조심하세요, 악마가 석방되어 돌아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자 교육 들어간다?
1194년 잉글랜드로 돌아오자마자, 필리프2세를 치기로 결심하는데 리처드의 용맹술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던 필리프였던지라, 치고빠지는 형태의 전술로 계속 전쟁을 질질 끌다가, 프레테발 전투에서 리처드에게 대패하고 가까스로 탈출을 하고1196년 리처드1세와 필리프2세는 잉글랜드쪽으로 유리한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또 불씨가 솟아나게 되면서, 몇달뒤 또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 전쟁은 계속해서 짧은 휴전과 바로 전쟁의 패턴의 반복이 됨.
전사
1199년 4월, 계속해서 필리프와의 전쟁을 벌이던 리처드는 리모주(Limoges)에서 Châlus-Chabrol성을 포위하고 전투과정에서 적이 발사한 석궁에 어깨를 맞는데, 생각보다 심각한 부상으로 석궁에 맞은지 11일만에 사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