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군주(927~1707), 고위귀족/플랜테저넷 왕조

리처드2세

Mintaka5 2025. 5. 23.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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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 리처드2세(Richard II, 1367~1400, 재위1377~1399)

  전임 군주 당시 재직 군주 후임 군주
직위 아키텐 공작, 잉글랜드 왕  아키텐 공작, 잉글랜드 왕 아키텐 공작, 잉글랜드 왕, 랭커스터 공작
가문 플랜태저넷 플랜태저넷 랭커스터
명칭 에드워드3세
Edward III
리처드2세
Richard II
헨리4세
Henry IV
생몰년도 1312.11.13 ~ 1377.06.21 1367.01.06 ~ 1400.02.14 1367.04.15 ~ 1413.03.20
재위 아키텐 공작
1차:1325.09.10 ~ 1362.07.19
2차:1372.10.06 ~ 1377.06.21
아키텐 공작
1377.06.21 ~ 1390.03.02
아키텐 공작, 랭커스터 공작
1399.02.03
잉글랜드 왕
1327.01.25 ~ 1377.06.21
잉글랜드 왕
1377.06.21 ~ 1399.09.30
잉글랜드 왕
1399.09.30 ~ 1413.03.20

잉글랜드 왕 리처드2세 초상화
리처드2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367년 1월 6일, 아키텐 공국 보르도(Bordeaux)에서 아버지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1376)와 어머니 켄트의 조안(Joan of Kent, 1328~1385)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잉글랜드 왕으로, 할아버지 에드워드3세(Edward III, 1312~1377, 재위1327~1377)를 이어 즉위하지만 어린나이에 즉위하고 권위를 위협하던 삼촌들로부터 항상 떨고 있던 군주였는데, 나름 프랑스와의 백년전쟁(1337~1453)도중 여러 휴전 협상들을 이끌어내며 안정화를 추구하는데는 성공하지만, 계속된 의심과 고위 귀족들의 권위향상을 참을 수 없어 1390년대 말 폭정을 일삼다가 사촌 헨리 볼링브로크(미래의 헨리4세)에 의해 항복과 동시에 귀족-평민 회의에서 폭정의한 33개의 조항 모두 혐의가 인정되어 귀족과 평민들의 만장일치로 폐위당하게 된다. 

 

초년

현재 프랑스 서쪽에 위치하던 아키텐 공국에서 태어났는데, 이는 아버지 흑태자 에드워드가 잉글랜드-프랑스간 백년전쟁(1337~1453)에 참전해있던 상태에서 리처드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버지 흑태자 에드워드는 백년전쟁 당시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장1세(Jean Ier, 1319~1364, 재위1350~1364)상대로 크게 이기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1370년 흑태자 에드워드는 이질에 걸려 잉글랜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는데, 치료가 장기화되고 회복이 잘 되지 않고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1376년 6월 흑태자는 아버지 에드워드3세(Edward III, 1312~1377, 재위1327~1377)보다도 먼저 사망하고 만다. 이 때 리처드의 나이는 불과 9세였는데 할아버지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 확실해지자 아버지의 동생인 곤트의 존(John of Gaunt, 1340~1399)이 왕위를 찬탈할 것을 두려워했는데 이에 에드워드3세는 손자에게 흑태자의 작위들과 왕세자를 뜻하는 웨일스 공작령을 하사하여 왕위계승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한다. 그러나 1377년 할아버지 에드워드3세마저도 승하하면서 10세의 리처드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삼촌 곤트의 존

1377년 어찌저찌 왕위에 오른 리처드2세는 대관식과 함께 통치를 시작하지만, 우려했던 것처럼 삼촌 곤트의 존이 정치적 야망을 점점 드러내게 되면서 어린 리처드를 이끌 섭정으로 삼촌들은 피했다. 리처드2세는 그리하여 의회에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고 어린 리처드는 삼촌 곤트의 존을 의회에서부터 제외시켜 화근을 피하려고 하는 태도를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트의 존과 존의 동생이자 리처드의 작은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Thomas of Woodstock, 1355~1397)가 왕실의 어른으로서 비공식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왕으로서 첫 성적표

리처드2세는 1380년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처음 내세우는 정책을 발표하는데, 이는 잉글랜드인으로부터 인두세(사람 머릿수에 맞춰 걷는 세금)를 받겠다는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이는 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부과가되는 세금으로서 일률적으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소득이 적은 사람일수록 부담이 커지고 소득이 큰 사람일수록 부담이 적어지는 세금제도였다(현재 지방세와 비슷한 개념). 그러나 이는 곧 민란으로 발전하게 되어버리는데, 특히 1340년대부터 유럽 전체를 휩쓴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전체인구중 30%가 사망하는 처참한 결과를 맞이하여 잉글랜드 역시 인구가 줄어들었는데, 특히 농민과 지주간의 갈등이 지속되던 터에 인두세까지 부과하겠다는 발표에 민란이 발생하게 된다. 1381년 6월, 농민들을 주축으로 런던에 집결해 민란이 발발하고 마는데, 이들은 농노제 폐지를 요구하면서 흥분한 상태였고 곤트의 존 궁이 불에 타고 재무장관, 법무장관등이 살해당한다. 나머지 행정요인들은 런던탑에 피신한 상태에서 더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협상을 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리처드2세는 당시 14세였는데 농민 민란군을 만나 그들의 요구에 동의하고 요구사항을 충족할 것이라고 거듭 밝히지만 이후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다툼이 벌어지게 되자 리처드2세는 직접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한다. 리처드는 민란 주도자들을 처형시키고 복종하게끔 각인시켜 왕으로서의 위엄을 세운다. 이 민란을 와트 타일러의 난(Wat Tyler's Rebellion, 1381)이라고도 한다. 

 

프랑스의 위협

리처드2세가 통치하던 시기는 프랑스와의 백년전쟁(1337~1453)중 2기에 해당하는 캐롤라인 전쟁(Caroline War, 1369~1389)때였다. 1360년, 프랑스 왕 장2세(Jean II, 1319~1364, 재위1350~1364)와 잉글랜드 왕이자 리처드2세의 할아버지 에드워드3세(Edward III, 1312~1377, 재위1327~1377)는 아키텐 공국의 주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프랑스 왕위 계승을 포기하면서 9년간의 평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1369년 브르타뉴와 카스티야에서 충돌이 일어나면서 다시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1380년 프랑스 왕 샤를5세(Charles V le Sage, 1338~1380, 재위1364~1380)가 사망하고 즉위한 12세의 샤를6세(Charles VI le fou, 1368~1422, 재위1380~1422)는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남동생들 즉 삼촌3명이 공동섭정을 하던실정에 아버지가 폐지했던 왕실 세금을 다시 부활시키려 하면서 프랑스에서도 반란이 일어남으로 혼란이 닥치게 되면서 잉글랜드 왕 리처드2세와 샤를6세는 1389년 휴전 협정을 맺기에 이른다. 

 

1396년 영구 휴전 협상

1389년 프랑스와 잉글랜드간 휴전이 선포되고 잉글랜드는 안정을 확보하게 되는데, 이에 리처드2세는 프랑스와의 영구적 평화 협상을 하기로 하고 샤를6세와 접촉하는데, 그 첫 제안은 잉글랜드의 소유가 된 아키텐 공국의 영토를 확장시키는 것이였는데 이는 프랑스측에서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요구조건이 들어가있었기에 이는 잉글랜드 전체가 받아들일 수가 없어 협상이 결렬되지만 이에도 전쟁을 다시 하기 원치 않았던 리처드2세는 휴전 협정 연장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1396년 프랑스 왕국 수도 파리에서 샤를6세와 리처드2세가 협정 조인 시점으로부터 28년간(1396~1424)휴정을 약속하며 샤를6세의 딸인 불과 7살이였던 이사벨 드 발루아(Isabelle de Valois, 1389~1409)를 22세 연상인 리처드2세와 약혼하고, 이사벨이 성년이 되었을 때 결혼한다는 조건으로 합의하게 된다. 

 

위기

1397년부터 리처드2세는 명확한 이유 없이 고위 귀족들을 체포하기 시작한다. 현재까지도 자세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리처드2세가 점점 커져가는 이들의 권력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했던 조취라고 인식하고 있다. 체포된 고위 귀족들은 종신형을선고받는등 표면적으로 리처드2세에게 대항하면 어떤결과가 보여지는지를 왕 스스로가 보여준 셈이였다. 그러나 리처드2세의 삼촌인 곤트의 존의 아들이자 리처드2세의 사촌이였던 헨리 볼링브로크(미래의 헨리4세, Henry Bolingbroke, Henry IV, 1367~1413, 재위1399~1413)가 있었는데 헨리 볼링브로크는 랭커스터 공작이였고 상당한 부와 함께 왕족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만큼 유력 왕위 후보까지 오를정도의 위치의 인물이였다. 1397년 12월 헨리 볼링브로크와 노퍽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Thomas Mowbray, 1385~1405)간에 다툼이 일어나면서 런던 궁정이 시끄러워진다. 두사람의 분란으로 리처드2세는 이 두명을 추방하기에 이르는데 헨리 볼링브로크는 10년형을 선고받고 망명길에 떠나게 되는데 도중 1399년 2월, 아버지 곤트의 존이 59세로 사망하면서 마땅히 아버지의 유산과 작위를 물려받을 권리가 있던 헨리 볼링브로크에게 리처드2세는 10년형의 망명기간을 종신형으로 늘리고 아버지의 재산을 왕실에 몰수하는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프랑스 왕국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볼링브로크는 이에 분노하여 방법을 찾고있다가 프랑스 왕국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헨리 볼링브로크의 입성

1399년 6월, 프랑스 샤를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1세(Louis Ier d'Orléans, 1372~1407)가 정신분열증으로 광인왕이 된 형 샤를6세(Charles VI le fou, 1368~1422, 재위1380~1422)의 왕실을 장악하는 일이 벌어진다. 왕실을 장악한 오를레앙 공작은 잉글랜드와의 휴전 정책은 자신의 치세에 방해가 되었기에 마침 리처드2세로부터 완전히 버림받게 된 헨리 볼링브로크를 잉글랜드로 보내 내전을 야기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여 헨리 볼링브로크를 1399년 6월 말경 잉글랜드에 보내게 된다. 헨리 볼링브로크는 자신의 재산과 아버지의 작위를 되찾기 위한 명분으로 잉글랜드 내 귀족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Henry Percy, 1341~1408)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Ralph Neville, 1364~1425)의 지원을 받아 런던 왕궁으로 쳐들어간다. 그렇게 점점 리처드2세의 폭정을 견디기 힘들었던 귀족들이 헨리 볼링브로크를 지지하며 지원하고 아예 진군시 저항도 받지 않게 되며 1399년 8월 19일 리처드2세는 플린트 성(현 영국 플린트셔 주 플린트)에서 헨리 볼링브로크에게 항복하였고 목숨을 살려준다면 퇴위하겠다고 약조한다. 그렇게 9월 1일 리처드는 런던탑에 투옥된다. 

 

폐위

이후 1개월 가까이 지난 1399년 9월 30일, 웨스터민스터에서 귀족과 평민들의 통합 회의에서 리처드2세의 폐위 문제가 오가면서 33개의 폐위 조항을 통해 귀족과 평민들의 만장일치로 수용한 회의결과로 리처드2세는 공식적으로 폐위된다. 그렇게 폐위된 잉글랜드 왕좌는 헨리 볼링브로크가 헨리4세(Henry IV, 1367~1413, 재위1399~1413)로 즉위하면서 시작된다. 리처드2세가 항복할 때 살려주면 퇴위하겠다는 약조를 헨리4세는 리처드2세의 목숨은 살려두지만, 불과 몇개월도 안되는 사이에 리처드2세의 추종 귀족들이 헨리4세를 살해하고 다시 리처드2세를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들통나면서 헨리4세는 리처드2세를 살려뒀다간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하여 1400년 2월경 포로로 갇힌 채 굶어 죽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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