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 시조 헨리2세(Henry II, 1133~1189, 재위1154~1189)
| 전임 군주 | 당시 재직 군주 | 후임 군주 | |
| 직위 | 볼로냐,모르탠 백작,잉글랜드 왕 | 노르망디,아키텐 공작,잉글랜드 왕 | 노르망디,아키텐 공작,잉글랜드 왕 |
| 가문 | 노르만 | 플랜태저넷 | |
| 명칭 | 스티븐 Stephen |
헨리2세 Henry II |
리처드1세 Richard I |
| 출신 | 프랑스, 블루아 | 노르망디 공국, 르맹 | 잉글랜드, 옥스퍼드 |
| 생몰년도 | 1092/1096 ~ 1154.10.25 | 1133.03.05 ~ 1189.07.06 | 1157.09.08 ~ 1199.04.06 |
| 재위 | 모르탠 백작 1113.xx.xx ~ 1144.01.19 |
앙주 백작, 노르망디 공작 1151.09.07 ~ 1189.07.06 |
아키텐 공작 1172.06.11 ~ 1199.04.06 |
| 불로뉴 백작 1125.xx.xx ~ 1146.12.25 |
아키텐 공작 1152.05.18 ~ 1189.07.06 |
||
| 노르망디 공작 1135.12.22 ~ 1144.01.19 |
잉글랜드 왕 1154.12.19 ~ 1189.07.06 |
앙주 백작,노르망디 공작,잉글랜드 왕 1189.09.03 ~ 1199.04.06 |
|
| 잉글랜드 왕 1135.12.22 ~ 1154.10.25 |
|||

출생
1133년 3월 5일, 노르망디 공국 르맹(Le Mans)에서 아버지 조프루아5세 당주(Geoffroy V d'Anjou, 1113~1151, 앙주재위1129~1151, 노르망디재위1144~1150)와 어머니 마틸다(Matilda, 1102~1167, 재위1141)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 최초의 군주이다. 1152년 아키텐 여공작이자 프랑스 왕 루이7세의 전왕비였던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결혼하여 광활한 아키텐 공국과 아버지 조프루아5세 공작에게 앙주 백국과 노르망디 공국까지 물려받으면서 거대한 앙주 제국을 운영하는 군주가 된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과 대립하였고, 이후 3명의 아들(청년왕헨리, 리처드, 존)과 왕비 엘레오노르를 포함한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18개월만에 진압하고 이후에는 프랑스 필리프2세 아우구스트의 이간계로 리처드와 존과는 골육상쟁을 벌이게 되고 이후 왕위계승권과 영토협상이라는 이간계를 들고온 필리프2세에 의해 부자간 칼을 드는 입장이 되어버리며 병든 몸을 이끌고 피하다가 아끼던 셋째 아들 존마저 리처드편에 섰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열병에 걸려 사망한다.
초년
헨리2세가 태어난 시점인 1133년은 할아버지 헨리1세(Henry I, 1068~1135, 재위1100~1135)가 통치하던 시기였는데, 헨리1세는 살아생전 자신의 딸이자 헨리2세의 어머니인 마틸다로 하여금 왕위주장을 지지하겠다고 조카인 블루아의 스티븐을 포함한 잉글랜드 귀족들로부터 서약을 받지만 1135년 헨리1세가 승하하고 스티븐이 약속을 깨고 잉글랜드 왕으로 대관받으면서 마틸다와 스티븐간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어린 헨리는 이런 혼란틈속에 모친 마틸다에 의해 키워지며 1139년 어머니 마틸다와 함께 아버지가 있던 앙주 백국으로 가게 되며 그곳에서 교육을 받는다. 1147년, 14세가 되던 무렵 헨리는 잉글랜드에 공격을 감행하지만 별 성과없이 끝나버리고 더욱이 부모님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던 원정이라 잉글랜드로도 노르망디로도 돌아갈 수 없었던 상황에 잉글랜드 왕 스티븐에게 의지하여 헨리의 상황을 해결해준 스티븐 왕이 헨리와의 관계를 통한 정치적인 이점을 잡고자 했다. 그러나 헨리는 2년이 지난 1149년 다시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 내전에 개입하게 된다. 이번에는 단독전개가 아닌 스코틀랜드 왕이자 큰삼촌이였던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1세(David I, 1084~1153. 재위1124~1153)와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과 동맹을 맺기로 하고 공격 계획을 짜지만 이것도 헨리가 노르망디로 돌아와야 했던 상황에 공격이 무산되고 만다.
통치 시작
1151년 9월 7일, 헨리의 아버지 조프루아5세 당주가 사망하면서 아버지가 가지고있던 앙주 백작 작위와 노르망디 공작 작위를 승계받는다. 당시 18세의 헨리는 프랑스 왕 루이7세(Louis VII, 1120~1180, 재위1137~1180)의 왕비인 알리오노르 다키텐(영어식 엘레오노르, Aliènor d'Aquitaine, 1122~1204, 아키텐재위1137~1204)과 비밀리에 연애중이였는데 이는 루이7세와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이가 나빠지고 이후 루이7세와 이혼하고 11살차이의 두 남녀는 1152년 결혼한다. 헨리는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으로 엘레오노르가 가지고있던 아키텐 공국을 포함한 상당한 영지를 획득하게 되면서 이로서 헨리는 프랑스 왕 루이7세보다도 더 큰 강역을 가지게 된다. 프랑스 왕 루이7세는 이에 위협을 느껴 잉글랜드 왕 스티븐과 프랑스 왕족, 친척들을 규합시켜 헨리에 대항하고자 동맹을 체결하고 전투를 벌인다. 헨리가 머무르고 있던 노르망디를 중심으로 한 전투는 연합군대에 의해 밀리다가 헨리의 신속 대응과 국경을 철저히 방비하고 오히려 연합군대 요충지를 공격하여 점령하는등 과감한 모습을 보이며 교착상태에 빠진 연합군에서 루이7세가 병에 걸리게 되면서 전쟁에서 물러나야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나머지 연합 군대는 헨리와 협상을 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잉글랜드 왕
루이7세가 병으로 인해 전투에서 빠지면서 사실상 홀로 동떨어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잉글랜드 왕 스티븐은 헨리가 잉글랜드로 직접 쳐들어오는 것을 듣고 군대를 집결시켜 월링퍼드(Wallingford)에서 대치하면서 한편으로는 뒤에서 비공식적으로 협상을 시도한다. 두 군대는 전투에 소극적으로 대하면서 협상을 시도하면서 중재를 시도하다가 스티븐의 아들 블루아의 윌리엄(William of Blois, 1135~1159)이 헨리에게 왕위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안전을 약속 받고 이후 스티븐과 헨리 사이에서 월링퍼드 조약(Treaty of Wallingford, 1153.11)을 체결함을 통해 헨리를 잉글랜드 차기 왕위계승자로 내정하고 헨리가 잉글랜드 왕위에 즉위했을 때 스티븐 왕의 아들 윌리엄에게 불로뉴 백작 직위를 주기로 약속한다.
즉위
I. 프랑스 왕 루이7세와 경쟁
1154년 12월 19일, 헨리는 잉글랜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엘레오노르와 함께 대관식을 치르면서 헨리2세로서 즉위하면서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를 열게 된다. 즉위 이후로도 귀족들은 헨리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헨리2세의 잠정적 경쟁자들은 수년내로 다 사망하면서 헨리2세의 왕권이 안정된다. 오랜기간 지속된 잉글랜드 내전으로 인해 국가 내외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특히 잉글랜드를 포함한 아키텐, 노르망디를 아우르는 광활한 영토를 놓고 프랑스 왕 루이7세(Louis VII, 1120~1180, 재위1137~1180)와 경쟁하는 사이가 된다. 헨리2세는 아키텐 남동쪽 경계지역에 있던 툴루즈 백국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기 위해 툴루즈 백작 레몽5세(Raymond V de Toulouse, 1134~1194, 재위1148~1194)에게 침공하겠다고 위협하고 이런 상황에 프랑스 왕 루이7세는 남쪽 전선을 교란시키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 콘스탄스(Constance de France, 1128~1176)를 레몽5세와 결혼시켜 사실상 혼인동맹을 맺는다. 사실상 프랑스가 동서로 경계를 두고 대치하는데, 헨리2세는 군대를 직접 이끌고 툴루즈 백국을 침공하는데, 침공 당시 루이7세가 툴루즈에서 레몽5세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군대를 철수하고 이 사건은 후일에도 계속 논란으로 거듭되고 두 군주 사이 군사적 긴장과 전쟁이 크게 번질 가능성을 조기에 중재하기 위해 교황 알렉산데르3세(Alexander PP. III, 1105~1181, 재위1159~1181)가 두 군주를 중재하기 위해 직접 나서 평화조약을 체결시키게 한다.
II. 앙주 제국
헨리2세는 잉글랜드 본토 영지보다 3배가 넘는 아키텐-앙주 공국을 통치함에 있어 중앙 집권이 잘 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잉글랜드야 오랫동안 유지해온 전통과 질서가 잡혀있다고 하지만 아키텐과 앙주등 각 지역별 관습등이 중앙집권을 어렵게 하게했다. 그럼에도 헨리2세는 몸소 직접 영지들을 다니면서 관리하였고 자신이 직접 주관하는 평의회를 통해 기강을 잡는 동시에 통치의 원활함을 유지하기 위해 느슨하게 적용하여 영지들을 다스린다. 장기간의 내전으로 인해 왕실 재정이 크게 위축되어버려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여 기존의 재정 질서를 개혁하지만 10년정도의 기간동안에는 앙주 제국 영지에서 거둬지는 세금으로 의존한다.
III.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
헨리2세는 루이7세의 전부인이였던 11살 연상 엘레오노르 다키텐 여공작과 1152년 결혼한 이후 거대한 앙주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신뢰로 엘레오노르 왕비가 통치하던 아키텐을 그대로 통치하게끔 하지만 엘레오노르는 남편을 위해 대부분 아키텐에 대한 통치를 헨리2세에게 맡김으로서 신뢰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1173년 헨리2세의 세 아들(청년왕 헨레, 리처드, 존)과 왕비 엘레오노르를 포함한 지지자들이 헨리2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18개월간(1173.04~1174.09)지속된 반란은 스코틀랜드에서 브르타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고 도시가 파괴되었다.
IV. 혼란의 연속과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
이전부터 프랑스 왕 루이7세(Louis VII, 1120~1180, 재위1137~1180)와의 분쟁은 1160년대에도 계속 지속되었는데, 루이7세입장에서도 헨리2세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내부적으로 성장을 거듭함과 동시에 주변국과 우호를 다져 동맹을 맺고 헨리2세에 대항하는 기조를 계속 이어나간다. 헨리2세는 3명의 딸을 카스티야, 작센, 툴루즈등에 시집보내 혼인동맹 전선을구축시켜 프랑스를 여전히 경계한다. 그러나 1163년 헨리2세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Thomas Becket, 1119~1170, 대주교1162~1170)과 논쟁이 벌어지는데, 헨리2세 자신이 임명했던 토마스 베켓이 캔터베리 대주교 령에 속한 토지와 세금 부과권등을 왕이 직접 행할 수 있게끔 회수하라고 요구하는데 이에 반대한 토마스 베켓간에 법정공방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점점 수세에 몰리던 토마스 베켓 대주교가 1164년 프랑스 루이7세에게 가게되면서 국제적 공방으로 번지게 된다. 이에 교황 알렉산데르3세(Alexander PP. III, 1105~1181, 재위1159~1181)까지 영향이 가게 되었는데 교황은 같은 성직자의 입장으로서 토마스 베켓 대주교를 지지했지만 속으로는 대립하던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1122~1190, 재위1155~1190)를 상대하는데 있어서 헨리2세의 도움역시 필요했기에 캔터베리 대주교와 헨리2세간 중재를 자처하여 협상을 벌여 해결하고자 했다. 1170년 7월 두 인물간 합의가 이루어지며 베켓이 잉글랜드로 들어오지만, 헨리2세의 지지자들을 추가로 파문하면서 격분한 헨리2세가 기사를 보내 캔터베리 대주교를 암살하게끔 한다. 이 일로 전 유럽의 군주들이경악하고 교황의 분노까지 사게되면서 헨리2세는 국제적인 압박을 받게 되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베켓 숭배'를 이용해 자신의 위신을 높이면서 정치적으로 몇년간 소위 조용히 지낸다.
말년
1174년 9월, 세 아들과 왕비 엘레오노르가 일으킨 반란이 18개월만에 종료되고, 내부적인 안정을 위해 왕비 엘레오노르를 유폐시키는데 이 유폐는 헨리2세가 승하하는 1189년까지 16년간 지속된다. 1183년엔 장남 청년왕 헨리가 헨리2세와 동생 리처드(미래의 리처드1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이후 이질과 열병으로 인해 사망해버리면서 헨리2세는 왕위계승을 둘째아들 리처드에게 물려주기로 결정은 하지만 장남의 반란으로 인해 실질적인 권력(작위)을 주지는 않게 하지만, 유독 이뻐하던 셋째아들 존(미래의 존 왕)에게만은 리처드에게 주지않은 핵심 보직인 아키텐 공작령을 하사한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리처드는 즉시 대항하지만 진압되어버리고 가족간 화해로 마무리되긴 한다. 그러나 이미 가족간의 신뢰가 깨어진지 오래된 터에 한명의 변수가 접근하는데, 프랑스 왕 루이7세의 외동아들인 필리프가 1180년 필리프2세(Philippe II Auguste, 1165~1223, 재위1180~1223)가 즉위하면서 교묘한 수법으로 인해 헨리2세와 두아들 리처드, 존에게 이간계를 사용하면서 분열을 일으키게끔 한다.
승하
필리프2세의 이간계로 부자와 형제지간의 신의가 무너지게 되면서 필리프2세는 베리(Berry)를 침공하고 이후 헨리2세가 필리프2세와의 협상을 통해 다시 부자를 이간질하는데, 리처드의 최약점인 왕위후계 공인선포를 들먹이며 영토와 맞바꾸자 했는데 헨리2세가 묵묵부답하며 리처드가 필리프2세에게 충성을 맹세해 버리면서 헨리2와 리처드 부자간 골육상쟁이 시작된다. 헨리2세는 필리프2세와 아들 리처드의 기습공격을 받고 피신하는데, 이미 병들어있던 헨리2세는 적군을 피해 피신하던 중 쓰러져 들것에 실려 옮겨지던 도중 자신이 아끼던 셋째 아들 존(미래의 존 왕)마저 리처드와 필리프2세편에 가담했다는 소식을 듣고 헨리2세는 충격을 받고 열병이 도지면서 1189년 7월 6일 승하한다.
'잉글랜드 군주(927~1707), 고위귀족 > 플랜테저넷 왕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 직계 계보 (0) | 2025.07.14 |
|---|---|
| 에드워드3세 (0) | 2025.07.09 |
| 헨리3세 (0) | 2025.06.04 |
| 리처드2세 (0) | 2025.05.23 |
| '사자왕' 리처드1세 (0) | 2024.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