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기구/조선

수원 화성(1796)

Mintaka5 2025. 3. 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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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1796

 

 

배경

조선22대 왕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는 1794년(정조18년) 수원화성 착공을 명 한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1735~1762)가 임오화변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뒤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가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장사지내 수은묘로 하여금 묘를 만들고 정조 즉위후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상시키고 1789년(정조13년) 10월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이는 1789년 7월 금성위 박명원(1725~1790)이 영우원의 관리가 잘 안되고 위치가 좋지않다는 상소를 올리면서부터 시작된다. 

정조는 이에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자 한 것으로 결정하였고, 즉시 시행하게 된다. 1789년 10월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게 되고 '현륭원'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면서 완공된다.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으로 비롯된 현륭원은 수원 화산에 거주하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할 계획도시를 기획하게 되는데, 이것이 수원 화성 건립이다. 

1793년(정조16년)부터 본격적으로 화성 축조를 준비하기 시작해 1794년(정조17년)착공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불과 2년반정도가 지난 1796년(정조20년)수원 화성이 완공되는데, 이렇게 짧은 공사기간동안 축조를 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실학자이자 발명에도 일가견이 있던 만능 학자 정약용(1762~1836)이 발명한 거중기 때문이였다. 그렇게 총5.5km길이의 성벽과 동서남북 성문등을 포함해 군사적인 시설로도 쓰일 수 있게끔 공사가 되었다. 

 

 

정조의 꿈 

I. 아버지 사도세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가 1762년 윤급(1697~1770)의 종인 나경언(?~1762)의 고변으로 발생한 임오화변으로 인해 할아버지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에 의해 뒤주에 갇혀 아사하기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봤는데,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은 효장세자(1719~1728)의 양자로 입적되어 세손이 되며 1776년 할아버지 영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마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상시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직접 영우원의 비문을 써서 내리고 1년에 2회씩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II. 영우원 화산 이전

1789년 7월(정조13년), 금성위 박명원(1725~1790)이 한가지 상소를 올린다. 내용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에 관한 것으로 영우원은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위치해있었는데, 관리가 잘 되지 않은 것에 위치까지 좋지 않다는 상소를 올려 이를 바로잡고자 주장한다. 이에 정조는 영우원을 옮길 장소를 수십군데를 물색하고 돌아보기까지 다 하고 최종적으로 수원 화산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1789년 7월에 시작된 상소로부터 바로 시작된 이전 작업은 3개월만인 1789년 10월에 화산으로 영우원을 옮겨오게 되면서 완료가 되고 정조는 영우원을 새로이 '현륭원(융릉)'으로 정하게 된다.

 

III. 백성

정조는 즉위전부터 노론, 소론세력들과 대립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을 만듦과 동시에 개혁정치를 실현코자 했는데 그럼 더욱이 자신을 따르는 군대와 신하가 필요했다.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개칭한 이래로 1793년(정조17년), 정조는 본격적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던 수원 화산에서 성 축조를 계획, 준비하여 1794년(정조18년)착공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사2년반만인 1796년(정조20년)에 수원 화성이 완공되는데 어째서 2년반만에 저 큰 성을 완공할 수 있었느냐는 당시 만능이였던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의 발명품 거중기가 힘이 되었다. 거중기는 성벽을 쌓는 돌을 끌어올리는데 있어 큰 효율성을 가짐으로서 전체적인 공사기간을 줄였다는 평을 받는다. 

축성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자는 채제공()이 맡게 된다. 정조는 수원 화성 건설에 대한 전반적인 과정을 모두 기록하여 편찬을 명하는데, 이것이 [화성성역의궤]이다. 수원 화성이 완공된 직후인 1796년 10월(정조20년)에 집필이 시작되어 2달만에 완성되는데, 간행은 1801년(순조1년)에 이루어진다.  

이미 영우원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수원 백성들을 성을 축조하는 화성 자리로 이주하게끔 하고 백성들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잘 생활할 수 있게끔 만들고 별도의 행궁을 세워 정조가 이곳에 행차했을 때 머물 수 있게끔 했으며, 정조 자신의 친위군인 장용영을 주둔시키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과 더불어 정당성 강화와 노론, 소론을 견제하기 위해 시파를 키우기위한 수단으로서와 방위를 위한 목적 모두 달성하기에 이른다. 

 

종합

그렇게 수원 화성에는 상인들이 들어오고 국가 행정, 경제, 군사의 거점으로서 새로이 거듭나게 되면서 더욱이 노론, 소론을 견제하는 시파들의 집결지 성격으로서의 정치적 야망도 이룩하여 중앙집권화에 성공하게 된다. 

이후 36년간의 긴 일제강점기(1910~1945)를 지나고 6.25전쟁(1950~1953)을 겪으면서 수원 화성 성 일부가 파손되고 손실되지만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하여 원래 모습으로 1970년대에 복원이 되면서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사적 3호로 관리되어있는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더욱이 그 입지를 곤고히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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