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앙투안 바토(Jean-Antoine Watteau, 1684~1721)
출생
1684년 10월 10일, 프랑스 북부 칼레항 인근 발랑시엔(Valenciennes)에서 아버지 필리프 바토(Philippe Watteau, 1660~1720)와 어머니 미쉘 바토(Michelle Watteau, 1653~1729)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아버지 필리프 바토는 타일공이였는데,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해 자식들을 구타를 했는데 이런 영향 때문이였을까, 바토는 내성적이다 못해 불안감에 의한 정신병을 앓게되어 평생동안 정신과를 들락거리게 되는데, 이런 현실의 아버지와의 갈등과 정신적 고통을 탈피하고자, 그림으로 표현하게 되는데 비현실적이게 아름답고 우아하고 화려하기까지한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기에 이른다. 페트 갈랑트(Fêtes galantes, 프랑스어로 '호색한 파티'라는 살짝은 섹슈얼적인 뜻)라고 불리는 기법 창시자로서 프랑스 로코코 회화는 바토로부터 시작했다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이다. 로카이유* 양식의 대표주자이며, 로카이유의 불규칙하고 비체계적인 형식은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 양식에 비해 가히 도발적이고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평까지 받을 정도였다.
* : 프랑스어로 조약돌이라는 뜻을 가지며, 로코코라는 단어가 이 단어로부터 유래가 됨. 필리프 도를레앙(1674~1723)의 섭정기, 루이15세(1710~1774) 통치기간에 상류층의 사치스런 취향을 지칭하는 말이다.
화가의 시작
어린시절 파리에 가서 본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그림을 보고 감명하여 작품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자크-알베르 게린(Jacques-Albert Gérin,1640~1702)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 동료화가들과 합숙과 작업을 병행해가며 생계를 유지하며(일주일3프랑의 주급과 매일 수프제공이라는 계약조건으로 인한 작업병행도 함), 이후 장식화가 클로드 오도랑(Claude Audran, 1658~1734)의 화방에 들어가 작업을 병행하기에 이르고 그렇게 고생을 한 끝에 1712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나, 선보이는 리셉션 작품은 1717년까지 5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는데 그렇게 5년간의 기다림 동안 나온 작품이 바로 아래 그림인 '시테라 섬의 순례'이다.
절정
앙투안은 1718년 하나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스스로가 이름짓지는 못하고 사후에 명명된 이 작품은 '베네치아풍 축제'라는 작품이다. 1719년까지 1년간 그린 이 작품은 작품안에 바토가 앉아서 뮤제트(파이프악기)를 연주하는 모습과 더불어 남자와 여자가 마치 춤을 추는 것을 연상시키는 표현을 한다.
죽음
갈수록 안좋아지는 건강상태와 재정상태로, 1719년에 그는 당시 가장 유명한 영국 의사 중 한 명이자 바토의 작품을 수집했던 리처드 미드(Richard Mead, 1673~1754)박사와 상담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나기로 결정 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게되지만 결국 약해진 육신으로 1721년 결핵으로 3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후 1789년 프랑스대혁명때 묘가 훼손되어, 유해는 흥분한 민중들에 의해 버려져버려 묘소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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