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한국어, 프랑스어)/고구려의 군주

19대 광개토대왕

Mintaka5 2024. 9. 1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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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gaet'o de Goguryo, 374~413, 재위391~413

 

 

출생

374년 고구려 국내성에서 아버지 고이련(고국양왕, ?~391, 재위384~391)과 기록미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남.  본명은 고담덕. 

 

배경

한국 역사 통틀어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만들어 놓은 정복군주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고구려의 위상이 오르며 중원의 맹주였던 후연, 한반도 내 백제, 신라(당시 동맹), 왜나라, 거란국등을 물리치며 영토를 확장한 인물이다. 한국사에서 2명의 대왕이 있는데, 세종대왕과 광개토대왕이다. 

 

원래는 군주와 거리가 멈

원래 담덕은 군주가 되기 어려운 쪽이였던게, 아버지 고국양왕에게는 형이 있었는데, 그 인물이 17대 소수림왕(?~384, 재위371~384)이다. 마침 소수림왕에게 후사가 없어 다음 왕위를 소수림왕의 동생이였던 고국양왕에게 물려주게 되면서 담덕 역시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

 

판 깔아줬으니 잘 하겠제?

숙부인 소수림왕과 아버지 고국양왕이 내치를 잘 신경쓴 탓에 고구려의 체제와 정비가 이때에 마무리되면서 내부적으론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는데, 고구려 외부는 그러지 못했다. 할아버지 고국원왕(300?~371, 재위331~371)대에 전연이 멸망하고 전연의 군주였던 모용황(297~348, 재위337~348)의 아들 모용수(326~396, 재위384~396)가 후연을 세우면서 강성해지면서 고구려 국경을 위협했고, 아래로는 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가 여전히 시시때때로 고구려를 노리고 있던 시점이였다.  

그런 도중에 384년 소수림왕이 승하하면서 아버지 고국양왕이 즉위하고 386년 담덕은 태자로 책봉되게 되는데, 아버지 고국양왕 역시 고구려 내치에 집중하면서 방비하다가 재위7년이 되는 391년 승하하면서 담덕이 즉위하게 된다.

 

즉위

391년 고담덕이 고구려19대 대왕으로 즉위하게된다. 연호는 영락.  즉위원년부터 귀족의 힘을 무력화시키고(사병철폐) 국가의 군대로 바꿔 군 제도를획일화 시키고 정비하고 병력을 대폭 증가시킨다. 정복전쟁의 서막. 

 

치트키 썼나?

즉위한지 2달밖에 안된 391년 여름에 4만의 병력(언제 그만큼모음?)을 가지고 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던 것과 390년 고구려 도곤성을 쳤던 것에대한 복수로 백제에 쳐들어간다.. 이 때 백제의 군주는 진사왕(?~392, 재위385~392)이였는데 궁을 새로 쌓고 연못을 만드는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낭비하고 사치와 향락에 젖어있다가 고구려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받고 당황하게 된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석현성(현재 경기북부 추정)주변을 공략하여 백제 북쪽 변경을 고구려의 손아귀에 넣고 이에 그치지 않고, 백제 GDP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던 요충지 관미성을 공략하기에 이른다. 관미성은 경제 요충지 뿐만아니라 백제의 관문(임진강, 한강이 모이는 지점)이고, 방어 거점 성으로서 그 용도가 수도 위례성 못지않은 매우 중요한 성이였다.

그러나, 석현성 공략 한달 이후 관미성까지 20일간의 수성을 하며 최대한으로 고구려군을 막지만 함락당한다.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용병술과 군사술에 있어서는 대적할 자가 없다는 말을 듣고 겁을먹어 막지도 못하니.. 백제 공략도중 백제 진사왕이 392년 승하하면서 진사왕의 조카였던 아신(아신왕, ?~405, 재위392~405, 진사왕의 형 침류왕의 아들)이 즉위하는데, 아신왕도 광개토대왕만큼은 아니지만 야심차고 용병술, 군사술이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군주이다.

그러나 아신왕 역시 394년 수곡성(현 황해도 신계지역)에서 광개토대왕에게 참패당하고 백제는 북쪽변경을 사실상 고구려에게 내어주면서 사실상 꺾여버리는데, 광개토대왕은 이에도 그치지 않고 396년 위례성까지 포위시키면서 아신왕의 항복을 받는다. 

 

눈치 빠르네..

광개토대왕이 백제 북쪽 변경을 공략하기 전의 배경으로, 신라는 이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고구려가 영토확장정책을 펼치며 혹 신라까지 공격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먼저 화친을제의해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는데, 고구려입장에서도 나쁠게 없었는게 백제와 왜를 둘다 동시에 견제 가능한 신라의 위치가 매우 중요했기때문. 

그렇게 해서 신라는 392년 영락원년당시 신라군주였던 17대 내물 마립간(?~402, 재위356~402)의 조카인 실성(미래의 실성왕)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마침 조약체결 이후 백제는 왜나라와 가야국과 연합을 해서 신라를 공격할 움직임을 보이게 되면서 내물 마립간의 판단이 적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신라로의 침입이 현실화 되면서 내물 마립간은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광개토대왕은 그렇게 신라를 구명하러 나서게 됨.  

 

?

광개토대왕은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고구려로 회군하는 길에 국내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위쪽으로 북상해 거란족이 세운 국가 비려국을 친다. 이전 소수림왕때(소수림왕7년, 378년) 침입해서 노략질하고 고구려 백성 1만여명을 강제로 잡아가 못살게 굴었던 것을 빌미로 아예그냥 비려를 가볍게 치는 정도가 아니라 본거지를 쳐버린다. 당시 본거지는 기주(현 중국 허베이성 근방)로서 광개토대왕은 이곳을 쳐서 비려군자체를 토벌시키고 잡혀갔던 고구려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끔 한다.

 

왜국은 긴장하그라이 

백제는 근초고왕(300?~375, 재위346~375)때부터 활발하게 교류함과 동시에 혈맹에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미 아신왕이 고구려에 항복한 전력으로 감정이 많이 쌓여있던 상태에서 태자 전지(미래의 전지왕)를 왜국에 보내면서 다시금 동맹을 확인하고, 왜나라와 가야국과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는데, 이에 내물 마립간이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광개토대왕은 5만의 병력으로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물리쳐 낙동강 끄트머리(금관가야국 끝부분)까지 몰아낸다.

 

거 우리랑 피한방울도 안섞인놈들이.. 

고구려군이 신라를 구원하기위해 5만의 병력이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격퇴하고 있을때, 북방의 후연의 황제 모용성(373~401, 재위398~401)이 고구려 변경 신성과 남소성을 공격하면서 빡이 친 광개토대왕은 402년 후연의 요충지인 숙군성(현 중국 랴오닝성 부근)을 함락시키면서 404년 북경지방까지 진출. 유주를 설치하고 군사를 정비하면서 407년 대군을 이끌고 후연 수도 용성을 함락시킴으로서 사실상 후연을 정복하기에 이른다. 

이때 용성이 함락되고, 후연 황제 모용희(385~407, 재위401~407)가 풍발에 의해 암살당하고, 풍발(?~430, 재위409~430)이 고구려 출신 후연관리인 고운(?~409, 재위407~409, 모용보의 양자로서 이름 모용)을 군주로 옹립시키면서 고구려에 투항하면서 광개토대왕에게 교지를 받고, 북연의 왕이 된다.  

 

자 이제 국가 내적으로 좀 볼까?

392년 즉위원년부터 407년 후연정벌에 이르기까지 15년간 한시도 쉬지않고 정복에 나선 광개토대왕은 오랜 정복전쟁으로 인한 국고를 고려해 407년 이후로부터는 내치에 신경을 쓴 모습들이 보인다. 왕권강화는 기본이고, 평양천도를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한다(보통은 장수왕이 평양성천도를 했다고는 하는데, 광개토대왕때부터 계획된 것). 

남쪽방어에 상당히 유리한 지점인 평양성은 넓은 평야에 대동강까지 낀 요충지로서 국내성보다 더 좋은 위치를 가진다고 판단해, 광개토대왕이 이를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승하

그러나 413년 39세의 나이로 갑자기 승하한다. 추측으로는 오랜기간 전쟁터를 오가면서 과로, 스트레스등이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만 있을 뿐 확실한 자료는 없다.

이후 고구려 대왕은 아들 고거련이 20대 장수왕(394~491, 재위413~491)으로 즉위하며 그 명목을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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