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한국어, 프랑스어)/고려의 군주

31대 공민왕

Mintaka5 2024. 9. 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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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gmin de Goryeo, 1330~1374, 재위1351~1374

공민왕 어진,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330년 아버지 충숙왕(1294~1339, 재위1313~1330, 1332~1339)과 어머니 공원왕후 홍씨(명덕태후, 1298~1380)사이에서 태어남. 본명은 왕전 몽골식 이름은 바얀테무르. 위로는 동복형 충혜왕(1315~1344, 재위1330~1332, 1339~1343)이 있다.

 

배경

원나라 간섭기 군주로서, 고려 말기 혼란스러운 틈에서 개혁을 하고자한 개혁군주로 원나라 간섭기를 벗어나 1259년 이전의 자주성을 가진 고려로 돌리려고 시도했던 군주이다. 원 탈피 첫단계는 권문세족(친원)을 숙청하여 원과 고려의 권력연결고리를 끊는 거였고, 노비를 해방시키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악법으로 행한 불법적 토지를 국가로 회수해 균등하게 배분하려고 함과 동시에 왕권을 강화를 노렸다.

그리고 앞서 말한 권문세족을 견제하기 위한 새로운 새력으로 신진사대부를 등용해 기존세력(권문세족)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말년에 혼란스러워지는데 특히 1365년에 사랑했던 노국대장공주(?~1365)가 승하함으로서 그 혼란이 더 배가되다가 1374년 암살당하면서 시행하려던 개혁들은 모두 폐지되기에 이른다.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 희망.

 

즉위

1351년 조카였던 충정왕(1338~1352, 재위1349~1351)이 원나라에 의해 폐위가 결정됨에따라 폐위되고, 강릉대군 왕전 31대 공민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하면서부터 이미 이전부터 빈번하게 노략질과 약탈, 강간등을 일삼았던 왜구들의 침입과 홍건적의 침입으로 민생문제가 어느때보다도 시급한 상황이였다. 

 

원나라 간섭 벗어나야제?

I. 정방 폐지

1352년 즉위한지 몇달되지 않은 공민왕은 개혁에 착수하게 되면서, 이전에 무신정권(1170~1270)중반 최우(1166~1249)가 설치했던 정치기구 정방을 폐지함으로서, 스스로 친정하려고하는 첫 의지를 선보이게 된다. 모든 정무를 자신이 보겠다는 권리를 찾은 것인데, 이때부터 사실상 친정이 시작되면서 공민왕의 민생정치와 더불어 부정부패 관리들의 단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첫 시작신호라고 봐도 좋다.   

II. 정동행성 폐지

사실상 원나라간섭을 벗어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보여진 것이 이 정동행성 폐지이다. 1280년 충렬왕 6년에 설치된 이 정동행성은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관으로서, 당시 원이 왜나라를 고려와 함께 정벌하겠다고 천명하면서 설치되어졌던 기관인데, 태풍2번 맞고 왜 정벌 실패를사실상 선언한 이후엔, 폐지되지 않고 조선총독부처럼 고려를 간섭하는 기관으로 남아있게 된다.

공민왕은 이에 정동행성 기관을 1356년 없애버림으로서 원 간섭에 시원하게 통수를 날리고, 고려의 고유한 제도를 다시 정착시키기에 이른다.

 

병신정변

I. 매국노들 쓸어버리자

때마침 공민왕이 즉위했을 1350년대는 고려의 국운도 쇠해가고 있었지만, 원나라역시 쇠해가고 있던 시기였다. 공민왕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원나라로부터 탈피하여 독립을 이루기위한 개혁정치를 단행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1356년에 벌어 공민왕의 원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한 병신정변(1356)이다. 

일단 원나라로부터의 지배를 벗어나려면 친원을 외치는 권문세족부터 제거해야되겠다는 것이 주된 정책으로 삼아졌다. 권문세족들은 원나라로부터 힘을 빌어와 고려 내에서 군주에 버금가는 권력과 부를 차지하면서 조정을 쥐락펴락 하고있었던 세력이였다. 공민왕은 마침 원나라가 쇠해가고 있던 틈에 이들을 숙청할 계획을 하는데,

첫번째 희생양은 행주 기씨 가문. 대표적인 인물로 원 혜종(1320~1370, 원재위1333~1368, 북원재위1368~1370)의 황후인 기황후(기 울제이 쿠투, 1315~1369)의 오빠인 부원배 기철(?~1356)이였는데, 친원세력중에서도 핵심중 핵심세력으로서 원나라뿐만아니라 고려에서도 권력의 핵심이였으니.. 기철은 1356년 4월 공민왕에게 궁궐 내 연회에 초청되는데, 공민왕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의 습격으로 인해 철퇴에 맞아 살해당하고 만다. 물론 기철뿐만아니라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들이나 친원파세력은 강력하게 처벌하게 된다. 이때 공민왕의명령을 받은 최측근 무장이 우리가 잘 알고있는 최영(1316~1388)이다.  

공민왕은 1356년 기철 일가를 숙청하면서 나머지 권문세족들을 제거함과 동시에 권력과 재산을 몰수하게 되면서 행주 기씨가문은 몰락하다시피 하게되는데, 이게 오히려 다른 권문세족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되면서 공민왕에게 있어서 악수가 되게 된다. 

II. 쌍성총관부

현재 북한 강원도 원산시 일대를 통치하던 원나라 행정담당 다루가치가 통치하던 지역이 쌍성총관부 였는데, 원나라가 쇠퇴함에 따라 쌍성총관부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데, 조소생(?~1362)과 조돈(1307~1380)이 각각 친원, 친고려정책으로 갈라지게 되면서 대립이 발생하게된다.  

이 분열이 마침 공민왕 재위 초기에 벌어진일이라 공민왕은 이때가 기회이다 싶어 1356년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기위한 공략을 지시하는데, 공략을 실행하기위한 발판을 마련하던 중에 조돈이 조카 조소생으로부터 구류되어있다가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하게 되면서 같이 투항하게 된 쌍성총관부 소속 민간인들이 대거 고려로 오게되면서 조소생은 여진쪽으로 튀게 된다. 

그러나 이후  조소생은 이미 1355년 아버지 이자춘(환조, 1315~1360)과 함께  고려로 귀부한 불세출의 명장 이성계(조선 태조, 1335~1408, 재위1392~1398)가 고려와 이미 내통하고 있던 터에 쌍성총관부 성문을 열게됨으로서 순식간에 함락당하면서 여진쪽으로 도망치기에 이른다.  

 

개혁

I. 전민변정도감

권문세족들이 계속해서 불법적으로 토지, 재산을 착취하고 빼앗아 백성들의 삶이 이만저만한게 아니였는데, 이에 공민왕은 1352년에 전민변정도감 개편, 1366년 전민추정도감으로 개편하여 불법적으로 착취한 토지, 재산등을 전국적으로 조사해서 환수해서 백성들에 다시 공평하게 돌려주고, 남은 것은 왕실 재정에 포함시킨다. 

특히 1366년 전민추정도감으로 개편함과 동시에 책임자를 신돈(1328~1371)으로 하여금 개혁을 추진하게끔한다. 

II. 노비 해방

권문세족들은 토지, 재산뿐만이아니라 노비까지 불법적으로 소유하는데 특히 고리대금쪽으로 돈을빌려주고 빚을 못갚은 백성들을 강제로 사노비로 만들어버리면서 재산을 증축시키기에 이르면서 고려 내 불평등이 더욱 극심해지게 된다. 사실상 노동력이 착취되면서 고려의 명목 GDP까지 떨어지는 결과까지 발생했으니.. 공민왕은 권문세족들이 부당하게 소유한노비등을 해방시킴으로서 국가발전에 토대로 만듬과 동시에 사회불평등을 해소시키고 권문세족의 힘을 빼놓아 왕권을강화하고자는 큰 그림을 완성시키게 된다.      

 

신돈의 최후 

신돈은 개혁으로 인해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권세가 올라가면서 공민왕만큼이나 권세가 어마어마해지는데, 공민왕역시 신돈의 권력이 부담스러워지는 지경에 이른다. 더욱이 이 개혁으로 권문세족들로부터 미움을 제대로 받는 신돈이였기에, 위험은 점점 커지고 있었는데..

신돈역시 권세가 커짐에 따라서 점점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게 되며, 수많은 첩과 주색등으로 틈을 보이게 되면서 권문세족들에게 그 빌미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 결과는 신돈이 공민왕앞에서 무례하게 행동하고, 뇌물을 받아 부정축재를 했으며, 간통까지 했다는 상소들이 올라오게 된다.  이후 공민왕과도 사이가 멀어짐에 따라 1369년 중랑장 이인(?~?)이 신돈이 반란을 모의중이라고 거짓정보를 당시 지밀직사 이던김속명(1297~1386)에게 서신을 전달하였고, 김속명은 공민왕에게 보고함에 따라 역모에 휘말려 1371년 처형된다. 

 

실패 

그러나 개혁은 한 국가의 국력이 많이 소모되는 작전인데, 공민왕때 하필 왜와 홍건적의 침략이 잦아지게 되면서 때아니게 국력이 더욱 급격하게 소모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마는데,  거기에다 모자라 1365년 간신히 회임을 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승하하면서 진심으로 사랑했던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제정신이 아니였다. 

이 충격으로 정사를 돌보지도 않고 상심에 빠져 술만 마셨다고 한다.  거기다 이후 등용한 개혁 1번투수 신돈마저도 몰락함과 동시에 공민왕이 추구하고자했던 개혁이 무용지물이 되면서 더욱 허탈감에 빠져 술과 이제는 남색까지.. 탐하게 된다.

 

암살

말년에 남색까지 밝히다가 1372년 젊고, 외모가 출중한 잘생긴 남성을 뽑아 시중을 들게끔 한 자제위를 설치해서 공민왕곁에서 시중을 들게끔 한다.

1374년, 이 자제위 출신중 한명이였던 홍륜(?~1374)이 공민왕의 후궁인 익비 한씨(공민왕 제3비, ?~?)와 간통했다는 사실을 최만생(?~1374)이 왕에게 직접 보고하니, 공민왕이 둘다 죽이려고 들면서 최만생이 홍륜과 함께 작전을 짜 술에취한 공민왕을 칼로찔러 죽이기에 이른다.

최만생과 홍륜을 포함한 공민왕 시해 주동자들은 거열형으로 처형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대 권신이였던 이인임(1312~1388)에 의해 후임 왕은 33대 우왕(1365~1389, 재위1374~1388)이 즉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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