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한국어, 프랑스어)/고려의 군주

32대 우왕

Mintaka5 2024. 9. 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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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de Goryeo, 1365~1389, 재위1374~1388

 

 

재위

1365년 고려 개경부에서 아버지 공민왕(1330~1374, 재위1351~1374)과 어머니 반야(?~1376)사이에서 태어남. 반야의 가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원래 신돈(1323~1371)의 노비였던 반야의 혈통을 한씨의 자식이라고 선언한다. 본명은 왕우(궁에 들어온이후) 또는 모니노(초명, 석가모니+종)

 

배경

1374년 아버지 공민왕이 홍륜과 자제위(젊고 외모가 출중한 청년으로 하여금 공민왕에게 시중을 들게 한 기관)에 의해 시해당하면서, 권신 이인임(1312~1388)의 추대를 받아 우왕이 즉위하게 된다. 격변하는 고려 내, 외 속에서 정통성논란에 시달려 복잡한 정치문제와 왜 침입등 다양한 사건에 마주하면서 불운해짐과 동시에 마지막엔 고려 왕실 정통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어 폐위되고 사사되기에 이른다.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군주라 할 수 있다.

 

즉위 전

사생아였던 모니노는 어머니 반야의 신분(신돈의 노비)으로 인해 태어나고 나서도 신돈의집에 머물다가 1371년 신돈이 숙청당하게 되면서 아버지 공민왕이 후계자로 삼기위해 궁으로 데려오게 된다.  공민왕은 1373년 모니노에게 왕우라는 이름을 받고 원자로 삼는다. 모니노라는 이름에서 왕우로 개칭하고, 강녕부원대군으로 봉한다.

사생아로서 다음 왕위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혼란을 야기시키는 행위였기에, 많은 대신들의 반대가 있었다. 원나라 조차도 우왕의 존재를 모를 만큼 공민왕이 우왕의 존재를 절대 공식화시키지 않고 숨겼다는 것을 반증한다.

공민왕은 모니노를 원자로 삼은 이후, 1374년 환관 최만생(?~1374)이 익비가 홍륜(?~1374)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게되면서 말을 전해온 최만생과 홍륜을 죽이려고 하여 이들이 먼저 앞서 공민왕을 시해하기에 이른다. 이후 모니노가 고려32대 우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이후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고 난 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조정은 반으로 갈라져 왕우에 대한 거치문제가 핫이슈가 된다. 결국 권신이자 수문하시중인 이인임 일파가 승리하면서 우왕이 9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된다.

우왕 즉위 찬성파 우왕 즉위 반대파
영녕군 왕유(?~1389) 명덕태후(1298~1380)
수문하시중 이인임(1312~1388) 좌시중 경복흥(?~1380)
밀직부사 왕안덕(?~1392) 수춘부원군 이수산(?~1376)

 즉위하고 나서도 정통성문제가 계속 우왕의 발목을잡게되면서 반대파를 눌리고 즉위했기 때문에 권력역시 반감.  

특히 이인임을 크게 중용하면서 이인임의 뜻에따라 국정문제를 처결함으로서 측근세력의 권력이 지나치게 쏠리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문제가 나타난다. 이인임 측근에 붙어 국정을 농단하는게 도가 지나치게 되면서 사회적 문제로 커지게 된다. 이때 이인임 측근을 3인방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생몰년도 직위
이인임 1312~1388 수문하시중, 광평부원군 
염흥방 ?~1388 밀직지신사, 삼사좌
임견미 ?~1388 문하시중, 평원부원군

 

원나라의 쇠퇴와 이인임

원나라는 1360년대 이후로부터 내분과 남쪽에서부터 일어난 한족들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웠다. 한족들의 반란은 1368년 곧 명나라의 창업으로 이어져 이인임은 명나라와 새로운 사대관계를 맺고, 북쪽으로 밀린 북원을 공격하여 실리를 취하지만, 명나라가 요동지역에 세력을 뻗치면서 사대관계였던 고려와 명의 사이가 틀어지는데, 이때 명이 고려가 북원과도 관계를 계속 가지고있는지 의심을 했는데,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더욱이 의심을 받다가 이인임이 북원과 명나라 둘다 관계를 유지하는 이중외교를 펼치면서 앞날의 상황이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이 이중외교 상황에서 신진사대부의 대표격 인물인 정도전(1342~1398)등이 북원사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옳지 않은 처사라 비판하여 이인임을 포함한 권문세족의 눈밖에 나며 유배당하고 복직하지 못하고 야인이 되는 신세가 된다. 

이 이후로 신진사대부 동료들은 복직되거나 변절해서 3인방의 뒷꽁무니를 xx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최영

금보기를 돌보듯이 봤던 최영(1316~1388)이 이때등장한다. 우왕의 든든한 방패막이이자 공격수였던 최영은 우왕 즉위 초기부터 왜구 격퇴, 홍건적 격퇴로 수많은 업적을 쌓는다. 지나치다 싶을정도로 고지식함과 칼날같은 강직함을 가진 충성스런 무장으로 이름이 나있던 인물이다.

1388년 우왕은 염흥방(?~1388)과 조반(1341~1401)간에 옥사가 터지면서 양아버지같았던 이인임은 살려두고 3인방중 2명인 염흥방과 임견미는 숙청시켜 정계를 정리하기에 이른다. 이 때 최영의 군대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정리한것. 

 

요동

1388년 2월 우왕은 최영과 함께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다음과 같이 수뇌부를 임명하게 된다.

  생몰년도 직위 
팔도도통사 최영 1316~1388 문하시중
좌군도통사 조민수 1324~1391 판문하부사, 창성부원군 
우군도통사 이성계 1335~1408, 조선재위1392~1398 수문하시중 

위화도에 도착한 군대는 장마철에 진군했던 탓에 큰 비를만나고 강이 범람하고 전염병이 발생하게 되면서 조민수와 함께 상의해 요동 불가론(사불가론)을 우왕에게 올리며 회군을 청한다. 다음은 태조(조선)게시물에서 가져온 사불가론 표이다. 

  사불가론 4가지 내용
1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공격할 수 없다(규모자체가 비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공격에 성공하더라도 후폭풍이 클 것이다).
2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현재 장마로 인해 군량미를 옮기는데 무리가 많다. 가을로 늦추자).
3 고려 전역의 군사를 동원해 멀리 나아가면 그만큼의 후방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왜적이 침입 할 것이다.
4 장마철의 높은습도로 인해 활이 느슨해지고, 역병을 앓을 것이므로 즉시 회군시켜달라.

그러나 우왕과 최영으로부터 환관 김환을 위화도로 보내 받아들일 수 없고, 더욱이 압록강 도강을 재촉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서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을 실행했다고 생각한 이성계가 조민수와 함께 환관 김환을 죽이고 회군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위화도 회군(1388)이다. 

 

최후

이들의 5만군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경으로 들어온 군대에 최영이 체포되어 귀양갔다가 개경으로 압송되어 처형. 그렇게 우왕은 폐위되고 강화도로 추방당하게 된다. 

추방당한지 1년만인 1389년 아들 창왕과함께 처형. 

신우, 신창부분은 33대 창왕에서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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