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귀족 가문 사람들 모음/메디치 가문

코시모 데 메디치

Mintaka5 2024. 6. 2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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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e de Médicis(1389~1464)

코시모 데 메디치,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389년 피렌체 공화국에서 아버지 지오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프랑스어Jean de Médicis,1360~1429)와 피카르다 드 부에리(Piccarda de Bueri, 1368~1433)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초 핵 다이아몬드 수저

메디치가문은 당시 메디치 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는 유럽16개국에 지점을 둘 만큼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는데, 한 지방의 경제력 수준이 아니라 당시엔 유럽전체 GDP의 몇%단위를 차지할만큼 엄청났다고 함.

 

인문주의자

르네상스시기 시작점으로부터 비롯된 인물로서,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대에 전성기를 누릴 수 있게끔 밑바탕을 그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사실상 코시모가 없었다면 로렌초도 없었다고 볼 수 있음, 프랑스의 루이13세와 비슷한 포지션이라 할 수 있다).

어릴적부터 수도원학교에서부터 프랑스어, 라틴어, 독일어에다가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랍어까지도 익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문서 수집취미가 있었는데, 학자와 예술인들을 사귀면서 심도깊은 대화의 토론모임에서도 수많은 고찰, 사색을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초 핵 다이아몬드 수저

메디치가문은 당시 메디치 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는 유럽16개국에 지점을 둘 만큼 재력이 상당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고문서를 수집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는데, 수집한 고문서들을 수십명에 달하는 전문가를 고용해서 필사케 해서 메데치 가문 도서관을 1443년 만들어서,  보관하게 함. 수많은 고문서(그리스, 로마 철학등등)들이 모여있는 도서관에서 영향을 받은인물들이 상당히 많은데, 대표적인 예시로 이후 208대 교황 니콜라오5세가 되는 토마소 파렌투첼리(Tommaso Parentucelli, 1397~1455, 재위1447~1455)인데, 당시 메디치 가문 도서관의 관장 출신이였다. 교황이 되고난 이후의 별명은 '인문주의자 교황' 이다.

 

알비치 가문

알비치 가는 피렌체의 귀족가문으로서 메디치가문과 경쟁 상대였던 가문중 하나인데, 피렌체에서도 화합과 경쟁을 서로 조용히 이어왔는데, 코시모가 영향력이 너무 커지고 동시에 메디치 가문 세력도 커짐으로 틈새를 노리다가 1432년 루카전쟁으로 인한 외교문제로 코시모가 피렌체를 비운 사이에, 코시모에 대한 음모를 꾸며 코시모가 1433년 피렌체로 귀환하자마자 3일만에 감옥에 수감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됨. 

알비치측에서는 사형을 시킬려고 반역죄다 무슨 죄다 다 뒤집어 씌우는데, 여론은 코시모 편이였는지(물론 코시모측에서 뇌물도 먹임) 사형까진 판결이 나지않고, 동생 로렌초 일 베키오(Lorenzo di Giovanni de' Medici, 1395~1440)와함께 재판을 받고 파도바로 추방당하게 됨. 그러나 파도바의 여론역시 코시모의 편이였는지.. 융숭한 대접을 받게되면서 사실상 유배지에서 작전본부를 세울만큼 대접받게 됨.

메디치가에 대한 무리수를 두었던 알비치로서는 피렌체 내에서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면서.. 틈을 노리고 있던 코시모에게 유배령 철회와 동시에 귀환하면서 사실상 알비치가문을 추방하게 된다.

 

형이야 형

1434년 피렌체로 돌아와 알비치가문을 몰아내고 난 뒤, 사실상 지배자가 되지만 철저한 자기관리와 겸손함, 솔선수범하며 행동하는 모습에 인기가 이전보다 더욱 치솟게 된다(역시 부자들이 더 허름하게 입고, 헌 차를 타더라...)

 

르네상스의 시작점

메디치 가문 도서관의 고문서로부터 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그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우게 되고, 이후 1439년 피렌체에서 그리스정교+로마카톨릭 공의회를 역병이 퍼져서 개최하기 힘든 페라라를 대신해 열렸는데 이를 계기로 위신이 높아지는데 이를 계기로 그리스쪽 학자들까지 피렌체에 몰리게되면서 수많은 고전문학, 철학, 미술, 역사등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피렌체가 순식간에 문화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게된다. 그리고 그리스, 이탈리아쪽의 예술가, 철학자들에게 후원을 하면서 더욱 문화가 융성하게 되는 계기가 됨(사실상 르네상스는 코시모가 열었다...?).

 

서거

1434년부터 30년간 사실상 피렌체의 통치자로서 정치, 문화, 예술 3관왕을 다 지휘하며 후원자로서도 넉넉하게 지원을 해준 결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예술가등이 이때부터 폭발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1464년 통풍으로 75세의 나이로 서거하게 됨. 코시모의 시기는 세종대왕(이도, 1397~1450, 재위1418~1450)의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데 코시모도 사실상 피렌체의 국부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군주가 아니라 세종대왕과  비등하진 않겠지만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졌던 것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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