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so d'Este, 1413~1471, 재위1450~1471
출생
사생아로, 1413년 에스테 가문 중심지 페라라(Ferrara)에서 아버지 니콜라 3세 데스테(Nicolas III d'Este, 1383~1441)와 어머니 스텔라 데 톨로메이(하녀, Stella de' Tolomei, ?~1419)사이에서 태어남.
에스테 가문
보통 이 가문에 대해 아는사람들은 왕비가 많이 나온 가문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임. 유럽의 거의 모든국가에 뿌리가 내려져있다해도 과언이아닐만큼 스며들어져 있다고 보면 됨. 그리고 900년대부터 이어져온 베틴 가문(La maison de Wettin)과 친척관계.
군.인.
10대말때부터 베네치아에서 군복무를 시작해서, 여러 전투에 참전하며 경력을 쌓는데 볼로냐 성 전투(1434)에서도 활약을 함. 이후 군대를 유지하면서 이어나가다 전투가 끝나면서 비스콘티가문에게 행정권을 받아 크레마(crema)시 시장이 됨.
이후 아버지 니콜라3세가 1441년 서거하고 유언에 따라 장남이자 보르소의 형인 리오넬( Lionel d'Este, 1407~1450, 재위1441~1450)에게 공작 작위가 물려짐. 리오넬이 에스테가문의 수장이되고난 후 보르소를 밀라노로 파견보내지만 금새 다시 페라라로 돌아와서 그냥 그저그런 수입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됨.
그냥.. 사업하자
군인으로서도, 행정으로서도 실패한 보르소로서는 이제 남은건 페라라밖에 없다 라고 생각하여 사실상 올인을 하게되는데, 형 리오넬의 고문이 되면서 사업을 동시에 하게되며 많은 돈을 벌게되면서 입지도 높아지고 사실상 에스테 가문 2인자로서의 역할도 하게됨. 근데 사업 잘 하고있다가 형 리오넬이 갑자기 1450년 사망해버린다.
뭐고 갑자기 내가?
형 리오넬이 갑자기 죽자 공석이 된 공작작위를 보르소가 받게 되는데, 신성로마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비로소 정식으로 공작작위를 승계받기에 2년간은 정무를 보면서 기회를 엿보게 됨. 이후 1452년 황제 프리드리히3세(Frédéric III du Saint-Empire, 1415~1493, 재위1452~1493)에게 정식 승인을 받게 된 이후 본격적으로 가문을 이끌게 되는데 주요정책이 가문팽창정책.
가즈자
스포르차가문과 메디치가문과 영혼의 맞다이를 까게 되는데, 이에 맞서서 보르소도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게되면서 이 승부가 피렌체 공작 계승전쟁성격을 띠는 몰리넬라 전투(Battle of Molinella, 1467)로서 펼쳐지게 됨. 전투이후 평화(1468년)가 오게되지만 페라라 가문이 2인자성격이 되었다는 것에 한탄을 하게 됨(군대규모도 서로비슷, 말그대로 그냥 전투하면서 똑같은 숫자가 죽고, 다치고, 부상당하고, 싸우고 그냥 답이안나와서 합의점 빨리 찾는데, 종전 후 사후협정에서 불리한 위치를 가짐).
마 내가 그래도 감각은 있으
사생아라는 타이틀로 인해 교육수준이 떨어졌었는데, 그런 결과로 스스로를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꾸밀려고 했던 것에 집중을 했던 것 으로 보여진다. 본인은 관대하다..뭐 이런식으로. 관대한 본인으로서 너희 예술가들을 지원하겠노라 이런 형태로서 자신을 선전하게 됨.
이게, 예술가를 진정으로 후원한 것이 아니라 결국 본인 선전에 이용을 한 것이라, 후원을 하지만 택도없는 금액으로 후원을 해서 예술가들의 공분을 사서 이때 페라라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피렌체나 볼로냐 쪽으로 많이 이동하게 됨. 채색하는데 쓰는 물감비용도 안나오는데 어찌 그림을 그릴 수 있었겠는가 말이야.. 뭐물론 다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서거
보르소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자녀가 없는채로 1471년 58세로 사망하는데, 이후 에스테가문의 수장은 이복동생인 에르꼴레 1세 데스테(HerculeIerd'Este, 1431~1505, 재위1471~1505)가 물려받게 되는데 에르꼴레 시대때 에스테가문은 가문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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