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101대~200대 교황

보니파시오 8세

Mintaka5 2024. 6. 1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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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Benedetto Caetani

Boniface VIII(1230?~1303, 재위1294~1303)

교황 보니파시오8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230년경 이탈리아 라치오주 프로시노네도 아나니(Anagni)에서 아버지 로프레도 까에타니 남작(Roffredo I Caetani)과 어머니 에밀리아 파트라소( Emilia Patrasso, 교황 알렉산데르4세 조카딸)사이에서 태어남.

어릴적부터 교회와 연결이 되어있던 집안으로서, 외삼촌인 레오나르도 파트라소(Leonardo Patrasso, 1230~1311)의 후원을 받으며 수도원에 들어가게되면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됨. 이후 먼저 선배 사제이자 주교가 레오나르도 파트라소를 따라가 신학,법학등을 공부하게 됨.

 

우리 가족중에 교황계심.

이후 글은 보니파시오8세의 즉위 전 이름인 베네데토로 소개하겠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어머니 에밀리아 파트라소의 삼촌이 교황 알렉산데르4세(Alexandre IV, 1199~1261, 재위1254~1261)였는데, 그렇다고 엄청 많은 혜택을 본 것은 아니지만, 소소하게 베네데토를 지켜보면서 중용하게 됨. 1264년 교황청에 법률가로 임명이 되는데, 당시 교황 우르바노4세(Urbanus IV, 1185~1264, 재위1261~1264)의 대표자 자격으로서 당시 분쟁지역이던 나폴리, 시칠리아 지역의 왕위다툼에 엉켜있던 샤를 당주(Charles d'Anjou, 1227~1285, 재위1266~1285, 프랑스 루이8세의 아들이자 루이9세의 남동생)와 협상을 하는데 동행을 하는 추기경이 미래에 마르티노4세(Martinus IV, 1220~1285, 재위1281~1285)가 되는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이다.

 

3명의 교황.. 시칠리아 협상?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미래의 마르티노4세, Martinus IV, 1220~1285, 재위1281~1285)에게 시칠리아로 가서 협상을 명했던 교황 우르바노4세(Urbanus IV, 1185~1264, 재위1261~1264) 가 선종해버리는데, 이후 새로 즉위한 클레멘스4세(Clemens IV, 1190~1268, 재위1265~1268)가 즉위 일주일만에 협상을 중지하라고 지시하는데, 이과정에서 새로 협상에 임명된 오토부오노 피에스키 추기경(Ottobono Fieschi,미래의 하드리아노5세, Hadrianus V , 1205~1276, 재위1276)와 반목하는 것은 아니나, 각기 다른방향쪽으로 입장차이가 생겨, 목적이 분산되버리는 결과가 나타나버려, 이런 혼란속에 베네데토는 잉글랜드에 1268년까지 머무르면서 당시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 1208~1265)와 헨리3세(Henry III, 1207~1272, 재위1216~1272)의 전쟁이후 사후뒤처리를 하게 된다.

1268년에 다시 교황청으로 돌아온 이후엔 딱히 남긴일이 없어서, 이야깃거리가 없다. 

 

추기경 서품

시칠리아 협상때 같이 떠났었던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이 마르티노4세(Martinus IV, 1220~1285, 재위1281~1285)로 1281년 즉위하면서 , 이번엔 베네데토가 교황 특사로서 분쟁을 중재하기위해 파견되는데, 이후 니콜라오4세(Nicholaus IV, 1227~1292, 재위1288~1292)의 고문 중 한명으로서 1289년 포르투갈 주교 서임권 분쟁 때 활약하게되고 이런 업적들로서, 니콜라오4세가 부재급 추기경이였던 베네데토를 사제급 추기경으로 승품시키게 된다(높은순서대로 주교급 추기경>사제급 추기경> 부제급 추기경).

 

교황

니콜라오4세(Nicholaus PP. IV, 1227~1292, 재위1288~1292)사후 다음 교황 첼레스티노5세(Caelestinus PP. V, 1215~1296, 재위1294)가 즉위하는데, 이미 1294년 즉위한지 5달만에 사임의사를 밝히게 되면서, 공석이 된 교황자리를 채우려면 당연히 콘클라베(conclave, 교황선출선거)를 열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1294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열린 콘클라베로, 베네데토가 교황에 선출이 되므로서(당선되려면 2/3이상의 과반수 표를 얻어야 됨), 보니파시오8세(Boniface PP. VIII, 1230?~1303, 재위1294~1303)로서193대 로마 교황에 등극하게 됨.

참고로, 이후에도 사임한 교황이 현재까지 2명이 더 있다. 그레고리오12세 (Gregorius PP. XII ,1325~1417, 재위1406)와 최근에 선종한 베네딕토16세(Benedictus PP. XVI, 1927~2022, 재위2005~2013)등.

 

난 당신 반대요

첼레스티노5세(Caelestinus V, 1215~1296, 재위1294)가 사임을 하는데 지금까지도 확실한 사유는 모르지만 당시 콜론나 가문이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보니파시오8세가 불법적으로 선출된 교황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게 되면서, 분쟁과 동시에 전쟁까지 벌어지는데 보니파시오는 란돌포 콜론나(Landolfo Colonna, 1250~1331)에게 진압을 명한다. 이후 보니파시오의 항복하면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을 믿고 항복하는데,  란돌포는 다 죽여버리게 되므로서.. 보니파시오는 온갖 욕을 다 먹게된다. 신의가 없는 교황으로.

 

필리프4세

루이9세(Louis IX, 1214~1270, 재위1226~1270), 필리프3세(Philippe III, 1245~1285, 재위1270~1285)를 거쳐 프랑스 카페왕조의 왕이되는 필리프4세(Philippe IV, 1268~1314, 재위1285~1314)와 충돌하게 되는데, 왕권이 커짐에 따라 교회로서는 불안한 요소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백년전쟁 전으로서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대립하던 잉글랜드와 프랑스 관계에서 프랑스가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내라고 하는 게 보니파시오8세로서는 빡치는 일이였음(전통적 권리 침해 이유). 이후 교황의 승인을 받지않고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서를 무려 평신도가 공표하게 되므로서, 적이 되는데..

이후 현대의 무역전쟁을 보는 것 같이 교역을 중단하라고 필리프4세가 지시함으로 맞대응을 펼치는데...  이후 나름 협상을 하면서 교역중단 철회등 중재자가 다방면으로 노력하게 되면서 필리프4세의 편의를 봐주기까지하는데.. 이후 교황 특사의 언쟁으로 빡이친 필리프4세가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감옥에 수감시킴(베르나르 세세 주교, Bernard Saisset, 1232~1314)

 

아들아 내 말을 들어라... 하

1302년 필리프4세에게 도달한 사절은 보니파시오8세가 서명한 칙서를 불에 태워버림으로서, 제대로 빡이 친 보니파시오8세가 확실히 교황권이 뭔지 보여주기위해 또 특사를 보내는데, 일부러 피하기위해 삼부회 개최.. 화가 끝까지 치민 보니파시오는 1303년 필리프4세를 포함한 프랑스 사람들을 파문시켜버림으로서, 이에 필리프4세는 교황의 신상을 폭로하면서 맞대응을 하여 다시 회의를 열어 교황을 새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 이후..걷잡을 수 없게되어 

필리프4세가 교황을 급습하기에 이른다. 대충,  교황잡아놓고 사표써 안쓰면 혼난다를 시전하는데, 교황은 당연히 차라리 죽겠다고 엄포를 놓는데 이과정에서 시아라 콜론나(Sciarra Colonna, 1270~1329)에게 뺨을 맞는다..

이 충격으로 한달만에 보니파시오8세는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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