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857~?
출생
857년(헌안왕원년) 신라 금성 사량부에서 아버지 최견일(?~?)과 신원 미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당나라 관료, 대학자, 문장가등으로 이름나있는 신라의 학자이자 사상가. 신라의 3최중 한명으로서 당대의 문신으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 중 한명이다. 6두품 귀족출신이였지만 당시의 골품제라는 출세의 한계로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유학생활을 거쳐 빈공과(외국인전형 과거시험, 6두품 출신이 많았음)에 응시해 급제함으로서 당나라 관료로 활동하다가 다시 신라로 돌아온다. 역시 외국에서도 한계가 있었기에 신라로 돌아와서 대문장가로서 명성을 이어감과 동시에 능력을 발휘하기위해 노력하지만 당시 통일신라말기 분열기 호족 세력대두로 혼란스러워지면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짐이 심해지다가 진성여왕(865?~898, 재위887~897)시기에 백성들이 봉기를 하게 되면서 내란이 지속됨으로 인해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시무10조)를 건의하지만 중앙정계 권력을 독점한 진골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회복이 되지않는 절망적인 현실에 속세를 떠나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골품제의 한계로인한 유학
868년(경문왕8년) 11세의 나이로 배를타고 당나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6두품출신의 한계를 이미 알고있던 아버지 최견일은 아들을 당나라로 보낸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아버지 최견일이 최치원에게 10년간 공부해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다면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그렇게 최치원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당나라로 떠나게 된다. 공부한지 10년이 채 되지않은 시점인 7년이 지났을 때인 874년 당나라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게 된다. 그러나 별다른 직책 없이 여행을 다니며 시짓고 놀고를 반복하다가 2년이 지난 876년에 표수현위가 되면서 당나라 관료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박학굉사과(시박능문의 인재를 뽑는, 문장3편을 고사하던 시험) 에 응시해 더욱 입지를 곤고히 하려고했던 최치원은 수입도 떨어지고 생활이 궁핍해지는 시점에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881)이 발생하게 되면서 다시 말단직으로 들어가게 된다.
토황소격문
881년(당 희종2년) 황소의 난이 발발하게 되면서 최치원은 종사관으로 천거되면서 이 난에 출전하게 된다. 뛰어난 문장력을 알고있던 군영 내에서 반란군 지도자 황소를 꾸짖는다는 격문으로서 [토황소격문]을 지어 보내는데, 황소의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해 위협을 하는 동시에 회유를 하면서 황소가 두려움을 느끼게끔 표현한다. 이 뛰어난 문장이 당나라 전역에 퍼지게 되면서 입지가 높아짐에 따라 능력을 인정받아 직급이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미 당나라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면서 종사관으로서 직책도 수행하기 힘든 여건이 되면서 더이상 당나라에 미련이 남지 않은 최치원이 885년 신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귀국
885년 당 희종(862~888, 재위873~888)의 사신의 역할을 함으로서 국서를 들고 신라로 들어옴과 동시에 완전 귀국하게 된다. 17년만에 고국땅을 밟은 최치원은 당시 신라 49대 왕인 헌강왕(861~886, 재위875~886)에게 본인이 지은 책들을 바치고 당나라에서 관료생활한 덕분에 쉽게 중앙정계에 진출해 벼슬살이를 하게 된다. 문서작성을 담당하는 담당관 역할을 주로했지만 886년 헌강왕이 승하해버리면서 다시 외직으로 나가게 된다. 아래 표는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온 후 헌강왕에게 바친 문집들이다.
내용 | 출판년도 | 권수 | |
계원필경 | 한시 문집,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집으로 현재까지 남아있음 | 879년 | 20권 |
사시금체부 | 자료가 남아있지 않음 | 연 도 미 상 |
1권 |
오언칠언금체시 | 1권 | ||
잡시부 | 1권 | ||
중산복궤집 | 5권 |
시무10조
진성여왕(865?~898, 재위887~897)이 즉위한 후 통일신라 말기 혼란스러웠던 정치를 바로잡고자 894년(진성여왕7년)시무책 10조를 올리지만 진골귀족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진성여왕은 시무10조를 올린 최치원에게 6등관계인 아찬 관등을 내리지만 관직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시무10조는 현재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순 없다.
관직 버린 이후
이후 전국을 유람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언제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908년 마지막행적이 확인될 뿐 이후론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