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목록/낭만파 시대

엑토르 베를리오즈

Mintaka5 2024. 7. 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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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ctor Berlioz, 1803~1869

베를리오즈,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03년 라 꼬뜨-생-앙드헤(La Côte-Saint-André)에서 아버지 루이 베를리오즈(Louis Berlioz, 1776~1848)와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 요제핀느 마흐미옹(Marie-Antoinette-Joséphine Marmion, 1784~1838)사이에서 태어남.

 

아버지

아버지 루이 베를리오즈는 의사였는데, 사심없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의술을 발휘해 치료하여 지역내 명성이 자자했는데 프랑스에서 최초로 침술을 도입한 의사로도 유명하다. 엑토르는 아버지의 권유로 6세(1809년)에 신학교로 들어가게 되는데 1811년 신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엑토르를 아버지가 직접 교육을 시키기로 한다.

보통 자식을 가르칠때면.,.(뭔지알죠?) 결국엔 서로 싸우거나 관계가 소원해지는데, 루이는 아들에게 편견을 전파하지 않았고, 강한 인내력으로 문학, 역사, 지리, 음악까지 가르쳐준 첫 스승이였다. 심지어 플루트의 기초까지 가르침.

이때 루이는 엑토르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발로뛰며 스승들을 데리고오는데 유독 루이는 피아노를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첫사랑 에스텔 드뵈프

엑토르가 12세때 살던 마을인 메일란(Meylan)에서 5살연상인 에스텔 드뵈프(Estelle Duboeuf)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빠진 이유는.. 쇼팽이 사랑에 빠진 느낌과 비슷하다(찌릿했다...등등). 첫사랑의 강렬한 감정으로 그 열정을 작곡하는데 사용.

 

아부지 난 음악이좋아요 뿌에에엥

이후 파리의과대학에 등록한후, 과정이수중에 아버지에게 의학보다 예술이 더 좋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826년 파리음악원에 들어가게 됨(빡이친 아버지 루이는 모든 금전지원을 다 끊기에 이름). 여러 콩쿨에서도 실패를 거듭하지만 포기하지않고 공부를 계속한 결과, 당시 거장음악가 루이지 케루비니(Luigi Cherubini, 1760~1842)로부터 푸가, 대위법등의 교육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성향이 맞지않던 케루비니와는 자주 마찰을 일삼는데, 아마도 시키는 것만 하는 게 아닌 스스로 깊게 탐구하는 성향의 엑토르였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상 1830년부터 음악가로서 이름이 오르는 시기인데, 이무렵 로마에 가서 콩쿨에 출전하는데,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으로 대상을 거머지고 그 대가로 로마로 유학을 감. 그러나 향수병이 도져 3년 유학과정에서 1년반만 버티고 다시 돌아오는데... 1832년 파리로 와서는 다시 생계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로마에서 작곡을 아예 안했다는 건 아니고, 아래와 같이 작곡을 했다.

  제목
로마에서 작곡한 곡들 Harold in Italy, op.16(1834)     '이탈리아의 해롤드'
Benvenuto Cellini, op.23(1838)    '벤베누토 첼리니'
Romeo et Juliette, op.17(1839)    '로미오와 줄리엣'

 

파리에서

파리로 돌아온뒤, 셰익스피어의 '햄릿' 공연중에 연극에 출연했던 아일랜드 출신 배우 해리엇 스미드슨(Harriet Smithson, 1800~1854)와 사랑에 빠지면서, 1833년 결혼에 골인. 아들 루이가 1834년에 태어나지만 해리엇의 의부증에 못이긴 엑토르는 바람을 피고..1843년 이혼

이혼한 이후부터는 작곡가보다는 지휘자로서 인정을 더 받게되면서 프랑스보다 해외에서 더 높이 평가받게 되는데, 이혼과동시에 만난 마리 레치오(Marie Recio, 1814~1862)와 함께 해외투어를 다니면서 음악활동을 같이 하게 됨. 이후의 시간동안은 해외에서 마리와함께, 수많은 국가를 계속 다니면서 연주를 하고 연주로 수입을 버는 등 경제활동을 이어나가게 됨.

 

말년

1862년 엑토르는 셰익스피어의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많은 고뇌'(Beaucoup de bruit pour rien)에 영감을 받아 오페라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Béatrice et Bénédict)를 작곡하는데, 그해엔 마리 레치오가 사망을 해버리고, 1866년엔 아들 루이마저 사망해버린다. 1868년, 엑토르가 살아있는동안의 마지막 여행이 되는 니스와 여동생이 거주하는 남부 그르노블로 여행을 가서 나폴레옹1세 황제의 기마상 건립을 위해 조직된 3일간의 축제에 시장의 초청을 받아 음악 행사 감독을 맡게 된다(사실상 마지막 활동)

1869년 파리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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