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édéric Chopin, 1810~1849
출생
1810년 폴란드 젤라조바볼라(Żelazowa Wola)에서 프랑스인 아버지 니콜라 쇼팽(Nicolas Chopin, 1771-1844)과 폴란드인 어머니 테클라 유스티나 크리자노프스카(Tekla Justyna Krzyżanowska, 1782-1861)사이에서 4남매중 둘쨰로 태어남(쇼팽이 유일한 아들).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
아버지가 프랑스인이고 어머니가 폴란드인으로서, 쇼팽의 국적을 따지는 문제가 계속해서 논쟁을 띠어왔는데 답도 안나오는 논쟁의 결과는 쇼팽의 정체성. 폴란드에서 태어난 쇼팽이라는 사람은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후자를 따르는 것이 맞다고 보는 가정하에 글 씀.(논쟁금지)
쇼팽자신조차도 폴란드인으로 여겼고, 동시대사람들, 주변인들도 모두 폴란드의 작곡가라고 이구동성 말함. 1810년 폴란드에서 출생한 후, 1830년 20세가될때까지 폴란드에서 보냄. 어린시절부터 20세(사실상완전한성인)가 될떄까지의 생활은 전세계 어느사람이더라도 정체성을 갖추기에는 아주 충분한 시간이다. 물론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할때까지 폴란드땅을 다시는 못밟을거라곤 생각못했을 것이다.
음악의 세계로
1807년 누나 루트비카 옌제예비치(Ludwika Jędrzejewicz, 1807~1855)가 태어난 이후3년뒤 1810년 쇼팽이 태어나게되면서, 출생하자마자 세례를 받고 바로 몇달 뒤 수도 바르샤바로 이사하게됨. 이때부터 부유한 지주가문의 자녀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열어 부모가 생계를 유지하게 됨.
쇼팽의 어머니는 당시에 인기가 별로 없었던 피아노를 구입해서 폴란드의 대중적인 춤, 노래, 폴란드민속노래등을 연주하게 되는데, 이 어머니의 연주모습을 직관했던 자녀들은 일찍부터 음악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됨.
일찍부터 음악에 재능이 있음이 드러난 쇼팽은, 부모님이 6살의 쇼팽을 데리고 체코출신 음악가 우치에크 주니(Wojciech Żywny, 1756~1842)에게 레슨을 맡기게 됨. 이 스승의 교육방식은 형식적으로 오랜시간동안 고강도의 연습을 강조하지않고, 쇼팽에게 자유를 주면서 최대한 여유를 가지게끔하여 창의성을 유도하는 방식의 교육이였음. 1817년 오긴스키(Michał Kleofas Ogiński, 1765~1833)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두개의 폴로네이즈(polonaise)를 작곡하는데,
한국어 | |
Polonaise en sol mineur, 1817* | 폴로네이즈 G 단조, 1817 |
Polonaise en si bémol majeur* | 폴로네이즈 B플랫 장조, 1817 |
*쇼팽 사후 발표된 곡들.
종종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를 하기도 했는데, 이때 이미 바르샤바 내에선 어린 모차르트로 유명해진 상태. 어린 나이(8세경)부터 귀족 생활 방식과 예의, 정교하고 뚜렷한 취향을 가진 쇼팽은 이후 평생동안 유지하게 된다.
이후 미래의 여친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는, 사랑스럽고 따뜻한 분위기의 가정속에서 자랐고, 어머니의 애정어린 시선아래 온화하고 가끔은 장난스러운 성격까지 가진 사람이 쇼팽이다 라고 얘기했을 정도.
더이상 가르칠게 없다...
스승 우치에크 주니(Wojciech Żywny, 1756~1842)는 1829년 쇼팽이 19세가되었을때 더이상 쇼팽에게 자기자신이 가르칠 것이 없어 같은 체코인 교사 빌헬름 뷔르펠(Wilhelm Würfel, 1790~1832)에게 오르간을 배우게 됨. 이 스승은 이전스승 주니보다 더 화려한 스타일의 방식을 선호했고, 고전주의를 탈피하고 새로운 이상과 미학에 대한 느낌을 쇼팽에게 전달시켜 준다.
1825년 초 쇼팽은 론도(Rondo en do mineur, op.1 , 1825)를 작곡한 후, 처음으로 언론에 언급이되면서 사실상 음악가로서 데뷔를 한다.
쇼팽은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와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1782~1840)을 통합시키고자 했는데,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바흐의 코딩과같이 짜여있는 촘촘한 방식(구조적)과 파가니니의 어디서 튈지모르는 예측불허한 불규칙적 변수가 통합되는 것을 목표로 하게됨.
그 후 1829년 첫 연주를 열고, 1830년 두번째 연주 역시 흥행에 성공하면서 이 젊은 피아니스트의 탁월한 재능으로서, 바르샤바의 리틀 모차르트로서., 그러나 바르샤바라는 지방에서만 자기를 칭송하는게 무슨 상관이 있겠냐며, 이후 이 사고가 더 확고해지면서, 1830년 폴란드를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됨.
폴란드를 떠난 후
드레스덴과 프라하를 거쳐서 오스트리아 빈에 당도하게 되는데, 여러 오페라들을 관람하며 음악적 소양을 쌓고있던 무렵에 프랑스에서는 7월혁명(1830년)이 터지면서 당시 국왕 샤를10세(Charles X, 1757~1836, 재위1824~1830)가 퇴위되고 이 혁명의 여파가 폴란드까지 번지게 되면서, 당시 러시아제국의 영향권에 있던 폴란드역시 반란이 일어나면서 고국이 짓밟히는 소식을 들으며 절망하면서 죄책감까지 들게 됨.
1831년 수입없이 콘서트에 참가하기까지 빈에서 7개월 넘게 존버를 하는데, 이때 작곡한 콘체르토1번(Chopin piano concerto no.2 op.21, 출판이 늦게되어 현재의 2번이 됨)이 연주는 만장일치로 칭송을 받지만, 당시 보수적인 비평가들의 판단으로 인해 아쉽게 되었다고 함.
에뛰드
지금도 악명높은 연습곡들인 쇼팽 피아노 에뛰드(op.10, op.25)가 빈에서 작곡이 되는데, 이 작품들이 대중적인 성공을 안겨다주면서 쇼팽의 자신만의 소리를 창조하기 위해 1~2번은 바흐로부터, 6번은 모차르트로부터 영감을 얻어 작업하게 됨.
이 작업이후로 빈에서 파리로 거주지를 옮겨서 왔을때쯤, 짓밟히던 고국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가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물론 더 절망할 것도 없었지만...
리스트
음대생들의 적(?)인 리스트를 이때 만나게 된다. 1811년생으로 쇼팽보다 1살이 어렸던 리스트는(Franz Liszt, 1811~1886)쇼팽과 성격이 완전 반대였는데, 쇼팽은 조용하고 차분하고 신중한성격이였던 반면에 리스트는 활발하고 신중하지는 못하지만 결단력있는등 다른점이 많이 보였던 친구였다. 리스트는 쇼팽의 독창성에 감탄을 하고, 인정을 하는데, 당대의 작곡가이자 낭만주의를 열은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쇼팽의 독창성을 인정하지 못한다.
상드와 마요르카
1838년부터 1847년까지 동거를 했던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와 오랜기간 깊은관계를 맺는데, 태어날 떄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상드와 쇼팽은 너무 결이달랐다. 상대적으로 차분한 쇼팽이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는데, 1838년 말, 상드의 두 자녀와 함께 마요르카에 머물게 되는데, 마치 우리의 한달살기 처럼 월 100프랑정도의 비용으로 거주지에 등록을 하게되는데, 이때 쇼팽은 인생 중 가장 편하고 꿀맛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겨울이 되면서 오게된 기관지염과 동시에 결핵에 걸리게 된다.
이 때, 마요르카에서 작곡한 대표적인 곡이 소나타3번이다(Chopin piano sonata no.3 op.58).
이외의 작곡된 곡 | Chopin berceuse op.57, la barcarole op.60, waltz op.64, sonata pour le piano et le cello op.65.... |
이후 결핵에 걸린 쇼팽을 상드가 지극히 보살피지만, 건강이 더 악화가 됨.
서서히 죽어가는 쇼팽
1839년부터 1846년까지 쇼팽은 노앙에서 7번의 여름을 보내게 된는데, 상드와 쇼팽은 아침에 자고, 오후와 저녁엔 활동, 밤에 글쓰고 .. (아주 신선놀음이 따로없네)물론 쇼팽의 재활목적이 더 큰 것이였으니.. 1845년 겨울, 1846년 봄에 독감과 이미 진행되고있던 폐병이 더 심해지면서 점점 쇠약해진다.
그러나 1847년 상드가 헤어져를 외친 후(쇼팽이 아프면서 몸이 멀어진 것...), 더욱 건강이 악화되는데, 안좋은 몸으로 1848년 런던에 당도하는데, 안그래도 산업혁명(영국은 1769년부터)이 한창 진행중이던 영국의 공기는 폐병을 앓던 쇼팽에게는 더 치명적이였음.
당시 영국을 통치하던 빅토리아 여왕(Victoria, 1819~1901, 재위1837~1901)과 앨버트 공(Albert de Saxe-Cobourg-Gotha, 1819~1861)과 아들 왕세자 에드워드(에드워드7세, Édouard VII, 1841~1910, 재위1901~1910)앞에서 연주를 하면서 명성 을 얻게 됨. 그러나 이런 명성에도 불구하고 몸이 이미 많이 망가져있던 쇼팽이였고, 병으로인한 지출이 매우 큰 상태라 버티지못하고, 파리로와서 다시 주간에는 교사로서 생활하면서 밤에는 친구들과 주로 시간을 보내게되는데, 특히 절친중 하나인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와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됨.
사망
1849년 각혈이 매우 심해지면서 사실상 죽음이 가까워지자 누나등 쇼팽을 도우러 파리로 달려오게되지만 결국 4달을 못버티고 당해 10월에 사망. 장례식이 끝나고 장송행진곡과 모차르트(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레퀴엠의 사운드에 맞춰 묘에 묻히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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