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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승문원

의정부(1400~1894, 1896~1907)조선시대 행정관청중 가장 높은 등급 정무기관이자 최고 의결기관으로 고려의 제도를 계승. 1279년(충렬왕5년)에 원간섭기로 관제 격하로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명칭이 바뀐다. 이후 1390년(공양왕1년)에 관제 개편으로 조직이 재정비되고 조선 건국 후에 의정부로 개편된다. 태조(1335~1408, 재위1392~1398)가 조선을 창업하면서 의정부 서사제(6조판서→의정부3정승→국왕)를 실시. 1414년(태종14년) 육조직계제(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수장 판서들은 상급기관 의정부를 거치치 않고 왕에게 직통 보고: 6조판서→왕)가 실시되며 왕권강화를 도모한다.이후로도 4대 세종(1397~1450, 재위1418~1450)이 의정부 서사제로 돌렸다가..

행정기구/조선 2024.10.24

승정원,춘추관,성균관

행정기관 승정원춘추관성균관빠른설명왕명출납 담당 행정기관(현재의 대통령비서실)시정 기록들을 관장한 행정기관(현재의 국가기록원)국립 교육기관(현재의 성균관대학교)**현 성균관대학교는 사립 종합 대학이다. I. 승정원(1400~1894)현재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군주의 비서기관. 군주가 내리는교지, 상소등이 승정원을 거쳐서 전달되었기에 상당히 핵심적인 기관. 태조원년인 1392년 중추원()에 도승지를 장관으로 삼은게 밑바탕이였고, 태종(1367~1422, 재위1400~1418)대에 들어 1405년(태종5년)에 별도의 승정원을 두면서 독립 관서로서의 형태가 만들어지고, 1433년(세종15년) 승정원 제도가 완비됨에 따라 6승지체제로 운영되며 1485년(성종16년) 경국대전에 이 체제가 그대로 등재되면서189..

행정기구/조선 2024.10.24

고려, 조선 군주의 묘호&시호

묘호군주가 죽은후 살아생전 공덕을 기려 붙인 이름.  배경유교식 왕실 예법으로 고,중,근대 동아시아에서 사용된 방식. 전임 군주가 승하하고 새로이 즉위하는 군주가 승하한 군주에게 조(祖) 또는 종(宗)이라는 형식으로 묘호를 올렸다. 조(祖)의 경우에는 창업군주또는 아주 위대한 천자(황제)에게만올렸던 묘호. 처음으로 묘호가 쓰이던 국가는 상나라(BC1600~BC1046)삼국시대때 유일하게 정식으로 묘호를 사용한 군주는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604~661, 재위654~661)이다. 고려의 경우에는 창업군주인 왕건(태조, 877~943, 재위918~943)에게만 조(祖)가 붙고 나머지 군주는 종(宗)이 붙는데 고려때는 외왕내제(대외적으론 왕, 내적으론 황제로 내세우는 체제)가 자리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묘..

행정기구/조선 2024.10.23

조선시대 육조, 삼사

육조조선시대(1392~1897, 대한제국1897~1910)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등의 6개의 큰 틀. 현재의 국가 부서. 각 부서의 기관장은 정2품 판서가 맡았다. 현재의 각 부서별 장관. 배경당나라(618~907)의 정부조직체계인 3성6부제의 영향을 받았다.황제3성6부상서성(정책, 행정)이부 :  인사 담당호부 :  재정 담당중서성(기밀, 정책발의, 행정승인)예부 :  의례, 외교 담당병부 :  군사 담당문하성(황명출납, 정책심의, 행정승인)형부 :  사법 담당공부 :  토목건축 담당당나라 관직을 자국 실정에 맞게 변형해 도입한 고려(918~1392)말기의 관제를 계승해 조선초기에도 쓰이다가 1400년(정종2년)의정부로 개칭, 1405년(태종5년)에 태종(1367~1422, 재위140..

행정기구/조선 2024.10.23

성혼

성혼(Seong Hon, 1535~1598)  출생1535년 조선 한성부 순화방에서 아버지 성수침(1493~1564)과 어머니 파평 윤씨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남. 배경아버지 성수침 밑에서 학문을 배우고, 백인걸(1497~1579)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이 때 평생 친구가 되는 율곡 이이(1536~1584)를 만나게 된다. 서인의 대표적인 인물. 1590년 좌찬성으로 공식 은퇴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다시 복귀하게 되는데.. 초년현량과로 천거되었지만 기묘사화(1519)이후 벼슬을 사양했던 아버지 성수침의 독남으로서 은거했던 아버지 아래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휴암 백인걸(1497~1579)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운다. 백인걸은 사림파였던 조광조(1482~1520)의 제자. 그러다가..

김일손

김일손(Kim il son, 1464~1498)  출생1464년 조선 경상도 청도군에서 아버지 김맹(1410~1483)과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서 3남중 막내로 태어남.  배경1498년 스승인 김종직(1431~1492)이 쓴 조의제문으로 인한 발단으로 일어난 무오사화로 처형을 당하는 인물.  초년1471년 아버지 김맹이 예문관 봉교(정7품)로 부임하면서 큰형 김준손(1454~1508), 작은형 김기손(1456~1493)과 함께 옥수정사에서 학문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1478년(성종9년) 14세가 되던 무렵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 아버지 김맹(1410~1483)은 종3품 사헌부 집의까지 오르는 중신이였는데, 1480년 김맹이 노환으로 병져누우면서 고향인청도로 가족모두가 내려가 이곳에서 이맹전(생육신중 ..

김굉필

김굉필(Kim Koeng-pil, 1454~1504)  출생1454년 조선 한성부 정동에서 아버지 김유(?~1487)와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조선 전기의 유학자로서 한훤당이라는 호로 더 잘알려진 인물. 1474년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인연이 된다. 소학동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소학에 심취했었다. 말년에 두번의 거친 사화(무오, 갑자)로 인해 그 운명을 달리하는 인물. 초년할아버지가 조선의 개국공신인 조반(1341~1401)의 사위가 되어 한성부 정동에서 살게 되면서 김굉필이 이곳에서 태어나게 된다. 보통의 시기보다 늦은 수학시기(20세)를 가지는데, 20세인 1474년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 수학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김맹성(조선)

김맹성(Kim maengseong, 1437~1487)  출생1437년 조선 경상도 성주(현 경북 성주 가천면)에서 아버지 김준례와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조선 초기 사림파의 대표격인 인물.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서 1452년부터 수학. 1476년 늦은나이인 39세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  초년1452년 15세가 되던 무렵에 6살많은 스승인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처음엔 개령 감문산(현 경북 김천시 개령면 감문산)에 들어가서 수학하고 이후엔 직지사(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에 들어가 수학한다. 스승 김종직의 마음에 쏙 들던 제자로서 그 총명함이 스승을 감복시켰다 한다. 후일 스승 김종직의 둘째아들이 본인의 딸과 혼인하면서..

율곡 이이

이이(Yi yi, 1536~1584)출생1536년 조선 강원도 강릉부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1501~1561)와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남.  배경5천원권의 주인공. 서인의 영수로서, 퇴계 이황(1502~1571)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의 대가로 이론뿐만아니라 현실에서도 적극적으로 성리학적 근반의 개혁을 하기위해 노력했던 주인공. 1583년 국방부장관격인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국방력 강화를 위해 [시무6조]를 올리지만 주장하지만 안일했던 대신들과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의 반대로 무산되고 다들 알듯이 9년뒤 임진왜란이 터지게 됨으로서 밀리게 된다. 한때 스님강릉에서 태어나 6살이 되던 해 경기도 파주 율곡리에 정착하면서 아호인 율곡이 이..

퇴계 이황

이황(Lee Hwang, 1502~1571)  출생1502년 조선 경상도 예안현(현 경북 안동시)에서 아버지 진사 이식(1463~1502)과 어머니 춘천 박씨사이에서 6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남. 배경1천원 지폐 주인공. 조선의 대표 유학자로서 우리에게는 퇴계 이황으로 익숙한 인물로 남인계열 동인의 정신적 지주격 인물.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서 그 수준을 한단계 더 격상시킨 학자로 평가받는 인물.  이황이 태어나고 자라던 어린시절 1500년대 초는 두번의 큰 사화(1498년 무오, 1504년 갑자)로 인해 정세가 어지러웠고 이에 민심을 제대로 잃은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인해 폐위되고 중종이 옹립되지만 반쪽짜리 권력에 불과해 중종역시 정계에 이끌려다닐 수 밖에 없던 입장이였다. 그리하여 조광조를 필두로한 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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