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황제/룩셈부르크

카를4세

Mintaka5 2025. 7. 1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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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가문 신성로마황제 카를4세(Karl IV, 1316~1378, 로마왕재위1346~1378, 신성로마재위1355~1378)

  전임 황제 당시 재직 황제 후임 황제
직위 바이에른 공작, 로마왕, 신성로마황제 룩셈부르크 백작, 아를,보헤미아,로마왕, 신성로마황제 룩셈부르크 공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보헤미아,헝가리,로마왕, 신성로마황제
가문
(왕조)
비텔스바흐 룩셈부르크
명칭 루트비히4세
Ludwig IV
카를4세
Karl IV
지기스문트
Sigismund
출신 신성로마제국, 뮌헨 신성로마제국, 크리보클라트 신성로마제국, 뉘른베르크
생몰년도 1282.04.xx ~ 1347.10.11 1316.05.14 ~ 1378.11.29 1368.02.14 ~ 1437.12.09
재위 바이에른 공작
1301.xx.xx ~ 1347.10.11
룩셈부르크 백작
1346.08.26 ~ 1353.xx.xx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1378.11.29 ~ 1397.04.03
1411.01.18 ~ 1415.04.30
아를 왕
1365.06.04 ~ 1378.11.29
헝가리 왕
1387.03.31 ~ 1437.12.09
로마왕
1314.10.20 ~ 1347.10.11
보헤미아 왕
1346.08.26 ~ 1378.11.29
로마왕
1411.07.11 ~ 1437.12.09
신성로마황제
1328.01.17 ~ 1347.10.11
로마왕
1346.07.11 ~ 1378.11.29
신성로마황제
1433.05.31 ~ 1437.12.09
신성로마황제
1355.04.05 ~ 1378.11.29

신성로마황제 룩셈부르크 왕조 황제 카를4세 초상화
카를4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316년 5월 14일, 신성로마제국 보헤미아 왕국, 크리보클라트(Křivoklát, 현재 체코 공화국 크리보클라트)에서 아버지 보헤미아 왕 얀 루쳄부르스키(Jan Lucemburský, 1296~1346, 재위1310~1346)와 어머니 엘리슈카 프르셰미슬로브나(Eliška Přemyslovna, 1292~1330)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 황제이다.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를 시작하여 로마왕, 신성로마황제등으로 이어지는 제국의 군주로 부상하고 신성로마제국 룩셈부르크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1356년 금인칙서(신성로마제국 제국법)를 통한 제국법을 발표하여 제국의 근간을 다지고 교황과도 우호관계를 다지며 안정을 이끌었고 보헤미아 왕국 수도 프라하를 기준으로 하여 지금까지도 유명한 건축물들과 예술, 문화등에 상당한 관심을 가져 투자한 군주로서 당시 프라하를 유럽 문화의 중심 도시로 만든 군주이기도 하다.

 

초년

카를은 유년기시절 기사 교육을 받기 위해 프랑스 왕 샤를4세(Charles IV, 1292~1328, 재위1322~1328)의 궁정에 보내져서 프랑스에서 지내게 된다. 프랑스 궁정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발루아 백작 샤를(Charles de Valois, 1270~1325)의 딸 블랑슈와 혼담이 오가면서 1323년 둘은 결혼하게 된다. 카를은 독일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자란만큼 프랑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체코어등 5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된다. 1328년 프랑스 왕 샤를4세를 끝으로 프랑스 카페왕조 직계가 끝나고 방계인 발루아 백작 샤를의 아들이자 블랑슈의 이복 동생인 필리프가 필리프6세(Philippe VI, 1293~1350, 재위1328~1350)으로 즉위하면서 프랑스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는 것을 카를이 직접 목격한다. 그렇게 1330년, 카를은 아내 블랑슈와 프랑스를 떠나 룩셈부르크 백작령에서 머무르고 아내 블랑슈를 룩셈부르크 백작령에 둔 채 아버지 얀 루쳄부르스키의 부름을 받고 1331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아버지 얀 루쳄부르스키가 자주 출정을 나갔기 때문에 카를은 보헤미아의 사실상 섭정으로서 아버지를 대신에 왕국을 이끄는 역할을 자주 하였다. 

 

즉위

1346년 8월 26일, 카를의 아버지 얀 루쳄부르스키 보헤미아 왕이 사망하면서 카를이 아버지를 이어 보헤미아의 왕으로 즉위하게 되고 아버지가 가졌던 작위들을 물려받는다.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하기 한 달 전인 1346년 7월엔, 교황 클레멘스6세(Clemens PP. VI, 1291~1352, 재위1342~1352, 교황 클레멘스6세는 프랑스인임)가 이전부터 황제 루트비히4세(Ludwig IV, 1282~1347, 로마왕재위1314~1347, 신성로마재위1328~1347)에게 지속적으로 퇴위를 요구해오다가 1346년 프랑스왕실과 인척이던(프랑스 왕 샤를4세의 왕비 마리아 폰 룩셈부르크와 카를의 아버지 얀 루쳄부르스키는 남매사이였고 두 남매의 아버지는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7세이다) 친 프랑스 계열이였던 카를을 로마왕으로 선출시켜 카를이 로마왕으로 즉위함과 동시에 황제 루트비히4세의 대립군주가 된다. 이후 보헤미아 왕 즉위식때 세례를 받으면서 대부이자 고모부인 샤를4세의 이름을 따서 세례를 받고 카를4세로 즉위하게 된다. 

 

로마왕과 신성로마황제

1346년 7월, 교황 클레멘스6세의 강력한 의지로 제후들로부터 로마왕으로 선출된 카를은 1년간 황제 루트비히4세의 대립 군주로서 경쟁하다가 1347년 10월 11일, 루트비히4세가 뮌헨 근방에서 멧돼지 사냥 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해버리면서 루트비히4세의 가문인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새로운 로마왕이 선출되어 카를4세와 경쟁하지만 카를의 지지자들이 승리하면서 사실상 경쟁자가 사라지면서 안정된 통치를 진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카를4세는 즉위할 때 부터 유럽에 1346년 첫등장해 퍼지기 시작하던 흑사병이 점차 확산됨에 따라 수도를 아헨(Aachen)에서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Praha)로 옮긴다. 프라하로 수도가 옮겨진 이후 카를4세는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프랑스식 모델을 적용하였고 자신의 이름을 딴 학교인 프라하 카렐 대학교를 1348년 설립하고, 바츨라프 광장과 세보나즈네 광장역시 카를4세의 작품이며, 1357년엔 프라하를 관통하는 강 블타바 강에 자신의 이름을딴 다리를 건설하게끔 하여 45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402년에 완성되는 카를교를 건설한다. 1353년엔 카를4세의 조언자이자 슐레스비히 주교인 디트리히 카겔비트(Dietrich Kagelwit, 1300~1367)가 카를4세의 궁정에 합류하게 되면서 카를4세의 총애를 받은 디트리히 카겔비트는 보헤미아 왕국의 재정 관리를 맡기고, 잘 임무를 수행한 보상으로 카를4세로부터 집정관 겸 보헤미아 왕국 대법관에 임명되었고, 외교사절단 임무까지 맡아 교황 인노첸시오6세(Innocentius PP. VI, 1282~1362, 재위1352~1362)로부터 호의를 받아 카를4세가 이탈리아 왕으로도 대관되었고 1355년 부활절에 교황 인노첸시오6세로부터 신성로마황제 황제관을 수여받음으로서 신성로마황제가 된다. 

 

금인칙서

카를4세는 황제가 된지 1년만인 1356년 1월, 금인칙서(Goldene Bulle)이라는 제국법을 뉘른베르크에서 발표한다. 라틴어로 쓰여있는 이 문서는 31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고 신성로마제국의 군주 계승 원칙과 권리를 기준잡아 로마왕 선출 기준을 7명의 선제후 선거인단 중 과반수(4표이상)이상 득표로 선출되어야 인정되고, 로마왕 서거시 1개월 이내에 제국 내 으뜸인 성직자이자 선제후, 재상인 마인츠 대주교가 새 로마왕을 선출할 선거를 치르게 해야한다고 규정하고 선거기간 1개월을 넘길 경우 빵과 물만 제공하도록 규정한다. 아래 표는 카를4세가 금인칙서에 기준잡은 7명의 선제후 직위를 설명해 놓았다. 

  선제후 직위 투표 순위 비고, 역할
I 트리어 대주교
Archbishop of Trier
1위 부르고뉴 공국 재상 역할 수행
II 쾰른 대주교
Archbishop of Cologne
2위 이탈리아 재상 역할 수행
III 보헤미아 왕
King of Bohemia
3위 세속 군주
IV 라인-팔츠 백작 
Count Palatine of the Rhine
4위 제국의 군주 부재시 신성로마제국 섭정권 가짐
V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Duke of Saxony-Wittenberg
5위
VI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Margrave of Brandenburg
6위 제국 황제의 시종
VII 마인츠 대주교
Archbishop of Mainz
7위 과반수 이상 결과가 나지 않을 경우 결정권을 가진 마인츠 대주교가 다시 재선거를 실시하게 함 

위 내용 이외에도 군대 행군 순서, 도시연합을 포함한 공동체 연합 체결 금지, 교황으로부터 선거 승인 받지 않아도 됨 등을 내용으로 명시해 놓는다. 금인칙서 발표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6세(Innocentius PP. VI, 1282~1362, 재위1352~1362)는 이 칙서에 딱히 관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로마의 귀족가문이자 유력가문이였던 비스콘티 가문과 경쟁하고 있을 때라, 이 가문의 영향력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인물이 카를4세밖에 없어서 칙서 내에 교황으로부터 선거 승인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에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1362년 교황이 승하할 때 까지 카를4세 황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 칙서는 1356년 1월엔 뉘른베르크에서 반포, 12월에는 메츠(Metz)에서 반포되며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1세(Napoleon Ier, 1769~1821, 재위1804~1814, 1815)에 의해 멸망할 때 까지 450년간 효력이 유지된다. 

 

승하

1378년 11월 29일, 카를4세는 62세의 나이로 프라하에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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