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황제/룩셈부르크

지기스문트(신성로마황제)

Mintaka5 2025. 7. 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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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가문 신성로마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 1368~1437, 로마왕재위1410~1437, 신성로마재위1433~1437)

  전임 황제 당시 재직 황제 후임 황제
직위 룩셈부르크 백작, 아를,보헤미아,로마왕, 신성로마황제 룩셈부르크 공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보헤미아,헝가리,로마왕, 신성로마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로마왕, 신성로마황제
가문
(왕조)
룩셈부르크 합스부르크
명칭 카를4세
Karl IV
지기스문트
Sigismund
프리드리히3세
Friedrich III
출신 신성로마제국, 크리보클라트 신성로마제국, 뉘른베르크 신성로마제국, 인스브루크
생몰년도 1316.05.14 ~ 1378.11.29 1368.02.14 ~ 1437.12.09 1415.09.21 ~ 1493.08.19
재위 룩셈부르크 백작
1346.08.26 ~ 1353.xx.xx
룩셈부르크 공작, 보헤미아 왕
1419.08.16 ~ 1437.12.09
오스트리아 대공
1457.11.23 ~ 1493.08.19
아를 왕
1365.06.04 ~ 1378.11.29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1378.11.29 ~ 1397.04.03
1411.01.18 ~ 1415.04.30
로마왕
1440.02.02 ~ 1486.02.16
보헤미아 왕
1346.08.26 ~ 1378.11.29
헝가리 왕
1387.03.31 ~ 1437.12.09
로마왕
1346.07.11 ~ 1378.11.29
로마왕
1411.07.11 ~ 1437.12.09
신성로마황제
1452.03.19 ~ 1493.08.19
신성로마황제
1355.04.05 ~ 1378.11.29
신성로마황제
1433.05.31 ~ 1437.12.09

룩셈부르크 가문 신성로마황제 지기스문트 초상화
지기스문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368년 2월 14일, 신성로마제국 뉘른베르크(Nürnberg)에서 아버지 신성로마황제 카를4세(Karl IV, 1316~1378, 로마왕재위1346~1378, 신성로마재위1355~1378)와 어머니 포메라니아의 엘리자베트 폰 포메라니아(Elisabeth von Pommern, 1345~1393, 카를4세의 4번째왕비)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룩셈부르크 가문 신성로마황제로 카를4세의 차남으로 태어나 이후 이복 형 바츨라프4세와 대립하고 로마왕자리까지 경쟁하나 1411년 선출되고, 1414년에는 35년넘게 줄곧 분열을 일으키던 서방교회 대분열(1378~1417)사태를 직접 중재하기 위해 대립교황 요한23세를 통해 공의회 개최를 하게 되며 3명의 교황(그레고리오12세, 대립교황요한23세, 대립교황 베네딕토13세)를 모두 폐위시키고 1417년 11월 콘클라베를 통해 최종적으로 마르티노5세를 선출하여 39년간의 긴 서구대이교를 종식시키기도 한다. 1415년 얀 후스 화형으로 인해 이후 1419년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할때 후스파의 봉기로 인해 15년간의 긴 후스전쟁을 치르는데 시간을 보낸다. 

 

초년과 상속

어린시절부터 언어공부를 숙달하는 데 있어서 능력이 있던 지기스문트는 독일어를 포함해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등 4개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1378년 11월 29일 아버지 카를4세가 사망함에 따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직을 상속받는다. 이는 지기스문트의 이복형 바츨라프4세(독일어 벤첼4세, Wenzel IV, 1361~1419, 선제후재위1373~1378, 로마왕재위1376~1400, 보헤미아재위1378~1419)가 1373년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직을 가지고 있었는데, 1378년 아버지 카를4세가 사망하기 두해전 1376년 이미 로마왕으로 임명되었고 카를4세가 사망하고는 보헤미아 왕 직위를 받으면서 동생 지기스문트에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직이 간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헝가리 왕

1370년대 초, 지기스문트가 유아이던 시절, 헝가리 왕은 러요시1세(I. Lajos, 1326~1382, 재위1342~1382)였는데, 자신의 어린 2녀 마리어(Maria, 1371~1395, 헝가리재위1382~1385, 1386~1395)를 지기스문트와 결혼하게끔 하는 약속을 지기스문트의 아버지 신성로마황제 카를4세와 하고 1385년 10월 헝가리에서 10대의 두 젊은 남녀는 결혼하게 되지만, 1382년 러요시1세가 사망하면서 딸밖에 없던 러요시1세는 장녀 마리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내 엘리자베스가 섭정에 오르는데, 헝가리 귀족들은 여성이 통치자가 된 것에 반발하여 합법 상속자를 나폴리 왕 카를로3세(Carlo III, 1345~1386, 나폴리재위1382~1386, 헝가리재위1385~1386)라고 주장하고 추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카를로3세도 같은 가문 경쟁자 루이 당주(Louis d'Anjou, 1339~1384)의 위협으로 헝가리 왕위를 얻기에는 무리가 많은 상황이였으나, 대비 엘리자베스가 지기스문트가 딸 마리어와 공동통치를 하려는 것을 반대하였고 지기스문트와 결혼한 마리어를 프랑스 루이 당주와 결혼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헝가리 궁정에서는 반발이 나고 귀족들 사이에서 분열이 벌어지면서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지기스문트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겨우 마리어와 결혼하지만 내전을 틈타 나폴리 왕 카를로3세가 헝가리로 쳐들어오면서 지기스문트는 이복 형이 통치하던 보헤미아 왕국 궁정으로 피신한다.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충성서약을 할 수 밖에없던 마리어 여왕의 상황에 대비 엘리자베스는 카를로3세를 일부러 여왕의 궁정에 초대하여 들어오게 하여 자신의 방에서 1386년 2월 24일, 카를로3세를 칼로 찔러 사망케끔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의 노력에도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지기스문트는 1386년 6월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진군해와 아내 마리어를 포로에서 해방시키고 데리고 나온다.   

 

나폴리 왕 라디슬라우스

1403년 8월, 나폴리 왕 카를로3세를 이어 즉위한 라디슬라우스(Ladislaus, 1377~1414, 재위1386~1414)가 교황 보니파시오9세(Bonifacius PP. IX, 1355~1404, 재위1389~1404)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 출신 야노시 카니자이 대주교(János Kanizsai, 1350~1418)가 재위를 주장하지여 지기스문트가 헝가리 귀족들과 합세하여 라디슬라우스의 침략을 막아내게 된다. 

 

로마왕 선출

1410년 5월 18일,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 로마왕 루프레히트(Robert, 1352~1410, 재위1400~1410)가 사망하면서 지기스문트는 이복형 바츨라프4세(독일어 벤첼4세, Wenzel IV, 1361~1419, 선제후재위1373~1378, 로마왕재위1376~1400, 보헤미아재위1378~1419)와 로마왕 선거를 두고 경쟁하게 되는데, 지기스문트가 1410년 9월 20일 로마왕 후보로 오르게 되면서 같이 경쟁하던 사촌 요프스트(Jobst von Mähren, 1351~1411, 브란덴부르크선제후1388~1411, 로마왕1410~1411)와 대립하는데 1411년 1월 요프스트가 갑자기 급사하면서 분쟁이 해결되고 1411년 7월 21일, 로마왕으로 공식 선출된다. 

 

서방교회 대분열 종식과 콘스탄츠 공의회 주도

로마왕에 오른 지기스문트는 당장에 유럽에 가장 큰 문제였던 서방교회 대분열(1378~1417)을 종식시키기 위해 직접 발로뛰며 나선다. 당시 유럽은 3명의 교황이 존재했는데, 피사 대립교황 요한23세(Antipope Ioannes XXIII, 1370~1419, 대립교황1410~1415)와 아비뇽 대립교황 베네딕토13세(Antipope Benedictus XIII, 1328~1423, 대립교황1394~1428)과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12세(Gregorius PP. XII, 1327~1417, 재위1406~1415)였다. 지기스문트의 중재는 대립교황 요한23세가 공의회를 수용할 의사를 밝히면서 신성로마제국 콘스탄츠(Konstanz)에서 1414년 공의회가 열리게된다. 이 공의회는 지기스문트의 요청으로 대립교황 요한23세가 소집한 성격을 띄었는데, 점점 적대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급기야 1415년 3월 20일, 대립교황 요한23세가 회의장을 빠져나와 도주해버리면서 회의주재를 지기스문트가 진행하는 상황도 발생하게 된다. 그렇게 회의는 지속되어 1417년 11월, 결론을내어 3명의 교황과 대립교황 그레고리오12세, 대립교황 요한23세, 베네딕토13세를 모두 폐위시키고 교황 선거인 콘클라베가 4일간(1417.11.08~11.09)진행되어 오도네 콜론나 추기경이 교황 마르티노5세(Martinus PP. V, 1368~1431, 재위1417~1431)로 선출되면서 서방교회 대분열이 종식된다. 

 

보헤미아 왕과 후스 전쟁

1419년 8월 16일, 이복형 바츨라프4세가 뇌졸중으로 사망해버리면서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 국왕직과 룩셈부르크 공작위를 승계받게 되며 즉위한다. 그러나 1415년 얀 후스(Jan Hus, 1369~1415)의 화형사건이후 지기스문트의 민심이 좋지 않던 상태에서 지기스문트가 왕으로 즉위한다는 소식을 들은 체코인들이 지기스문트를 거부하여 봉기하게 되면서 후스 전쟁(Hussitenkriege, 1419~1434)을 일으키게 된다. 이들은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하면서 봉기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는데 프라하의 후스파(1415년 선종한 얀 후스의 교파) 인파들이 프라하 시 의원 7명을 창밖으로 던져 사망케 함으로서 '후스 전쟁'이라 명명되어지게 된다. 지기스문트는 교황 마르티노5세의 지원을 받아 10만의 십자군을 통해 이들을 막고자 했으나, 5차례(1420, 1421, 1422, 1427, 1431)에 걸친 전투에서 모두 패해버리고 1434년 5월 30일 벌어지는 리파니 전투(The battle of Lipany, 1434.05.30)에서 후스파 군대는 십자군에 의해 대파당하면서 사실상 후스 전쟁이 끝나게 된다. 지기스문트는 종전 이후 보헤미아에서 소규모로 봉기를 일으키는 후스파를 1437년까지 제압하고 1436년에는 보헤미아 왕으로 공식 인정을 받게되는 조건으로 보헤미아 국민들의 종교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된다. 신성로마황제 대관식은 1433년 5월 31일 교황 에우제니오4세(Eugenius PP. IV, 1383~1447, 재위1431~1447)에 의해 대관되나 4년정도 황제위에 머무른다. 

 

승하

1437년 12월 9일, 지기스문트는 6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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