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왕 리처드3세(Richard III, 1452~1485, 재위1483~1485)
전임 군주 | 당시 재직 군주 | 후임 군주 | |
직위 | 웨일스 공작, 잉글랜드 | 글로스터 공작, 잉글랜드 왕 | 리치먼드 백작, 잉글랜드 왕 |
가문 | 요크 | 요크 | 튜더 |
명칭 | 에드워드5세 Edward V |
리처드3세 Richard III |
헨리7세 Henry VII |
생몰년도 | 1470.11.02 ~ 1483.09.xx | 1452.10.02 ~ 1485.08.22 | 1457.01.28 ~ 1509.04.21 |
재위 | 웨일스 공작 1471.06.26 ~ 1483.04.09 |
글로스터 공작 1461.11.01 ~ 1483.06.26 |
리치먼드 백작 1457.01.28 ~ 1461.11.04 |
잉글랜드 왕 1483.04.09 ~ 1483.06.25 |
잉글랜드 왕 1483.06.26 ~ 1485.08.22 |
잉글랜드 왕 1485.08.22 ~ 1509.04.21 |
출생
1452년 10월 2일,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셔 포더링헤이 성(Fotheringhay castle)에서 아버지 리처드의 요크(Richard of York, 1411~1460)와 어머니 세실리 네빌(Cecily Neville, 1415~1495)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요크 가문 출신 잉글랜드 왕으로, 친형 에드워드4세의 아래에서 군 지휘관으로 장미전쟁(1455~1487)에서 크게 활약하는데, 조카 에드워드5세가 즉위하고 형수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친형 에드워드4세간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에드워드5세가 사생아라는 명분으로 조카를 폐위시켜 왕위를 찬탈해 잉글랜드의 왕이 된다. 이후로도 크게 여론이 좋지않아 여러 위협을 받고, 랭커스터의 헨리 튜더(미래의 헨리7세)와의 최종 전투 보즈워스 전투에서 전사하여 30년간의 긴 장미전쟁이 종식되고 헨리 튜더가 헨리7세로 즉위하면서 잉글랜드 절대 왕조인 튜더 왕조가열린다. 2012년, 영국 레스터 시의회 주차장에서 527년만에 리처드3세의 유골이 발견되어 DNA검사를 통해 리처드3세임이 밝혀져 2015년 레스터 대성당에 안치시키고 왕으로서 장례를 치른다.
초년
요크 가문 리처드의 아들이자 에드워드4세(Edward IV, 1442~1483, 재위1461~1470, 1471~1483)의 친동생이다. 1461년 형 에드워드4세가 요크 가문으로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면서 리처드는 글로스터 공작으로 임명되고 6년전부터 벌어지던 잉글랜드 내전인 장미전쟁(1455~1487)으로 인해 랭커스터 가문과 대립하던 시기에 자라났다. 어린시절부터 군인으로서 훈련을 받아 군을 지휘하는데 능력을 보인다. 장미전쟁 동안 형 에드워드4세를 도와 군사 지원을 토대로 요크가문을 이끄는데, 랭커스터 파인 워릭 백작과 로버트 웰스()를 반역자로 선포한 뒤 이들은 프랑스 루이11세(Louis XI, 1423~1483, 재위1461~1483)에게 도망가서 환대를 받고, 루이11세의 지원을 받아 1470년 9월 잉글랜드 땅에 상륙한 뒤 북쪽에 신경쓰고 있던 에드워드4세의 허를 찔러 포위됨에 따라 에드워드4세는 부르고뉴 공국 공작 용담공 샤를(Charles le Téméraire, 1433~1477, 재위1467~1477)에게 망명한다. 그렇게 랭커스터 가문 헨리6세(Henry VI, 1421~1471, 재위1422~1461, 1470~1471)가 잉글랜드 왕위에 다시 앉지만, 1471년 두 가문사이 전투가 벌어지고 패배한 헨리6세는 런던탑에 유폐되어 이곳에서 사망하고(살해당했다는 것이 유력) 형 에드워드4세가 1471년 다시 잉글랜드 왕좌에 앉는다.
프랑스 침공
1471년 형 에드워드4세는 잉글랜드 왕으로 다시 앉자마자 1470년 랭커스터가를 지원하였던 프랑스 왕 루이11세에 분노하여 1475년 7월, 리처드로 하여금 칼레에 1만의 병력을 상륙하게끔 한다. 그러나 늦깎이 대응에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원정에 에드워드4세도 눈치를 보게 되었고 루이11세와 1475년 8월 29일 파퀴니 협약을 체결하여 교역을 늘리고 루이11세는 포로협상을 통해 몸값을 지불하여 포로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즉위
1483년 4월 9일 형 에드워드4세가 승하하면서 에드워드4세의 아들이자 리처드의 조카인 에드워드5세(Edward V, 1470~1483, 재위1483)가 즉위하게 되면서 어린 왕을 대신해 리처드는 섭정이 되었는데, 어린 에드워드5세가 왕궁을 떠나 남쪽 순방을 가있을 때 조카의 측근(이중 에드워드5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오빠도 포함되어 있었다)들을 모두 체포해 처형시켜버린다. 어린 조카에게는 역모를 꾸미는 세력이 있었는데 리처드 스스로가 그 세력을 처단했다고 보고하고 자신이 조카를 런던까지 안전하게 호위하기로 한다. 왕대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오빠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에드워드5세가 위험에 처했음을 인지하고 세력을 모아 리처드를 막게끔 한다. 그러나 리처드는 형수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평민 출신이고 혈통 문제와 더불어 조카가 형 에드워드4세의 친자식이 아니라 사생아라는 소문을 퍼뜨려 여론을 형성함에따라 1483년 6월 25일 귀족-평민 회의에서 친형과 형수의 결혼은 무효를 선언해 조카 에드워드5세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리처드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에드워드5세는 공식 폐위되고 리처드가 리처드3세(Richard III, 1452~1485, 재위1483~1485)로 즉위하게 된다.
장미전쟁과 전사
그렇게 1483년 6월 26일 즉위한 리처드3세는 전임 에드워드5세를 폐위시킨 것에 대한 불만으로 즉위 직후 잉글랜드 내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된다. 그들중 반 리처드파는 리처드3세를 폐위시켜 에드워드5세를 다시 복위시킬 계획까지 도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장미전쟁은 지속중이였고 랭커스터가의 헨리 튜더(미래의 헨리7세)는 에드워드5세 사망이후 잉글랜드로 돌아와 왕대비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왕 샤를8세(Charles VIII, 1470~1498, 재위1483~1498)와도 동맹을 맺는다. 그러다 1484년 4월 9일 리처드3세의 아들 웨일스 공작 에드워드(Edward of Middleham, 1473~1484)가 사망해버리면서 헨리 튜더가 리처드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할 명분이 생기면서 1485년 8월, 보즈워스 평원에서 요크가문과 랭커스터가문이 크게 맞붙게 된다(보즈워스 전투, Battle of Bosworth, 1485.08.22). 이 전투에서 리처드3세는 8월 22일, 전사함으로서 요크 가문은 패배하게 되고 헨리 튜더의 랭커스터 가문이 승리하여 표면적으로 30년간 이어진 장미전쟁이 종결된다.
2012년 리처드3세 유해발견
2012년, 영국 레스터 시의회 주차장 교회터에서 리처드3세의 유골이 발굴된다. 유골에서 추출한 DNA감식을 통해 2013년 2월 유골의 주인이 리처드3세임을 확인한 영국 정부는 2015년 3월 26일 리처드3세의 유해를 레스터 대성당에 안장시키고 장례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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