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황제/비텔스바흐

루트비히4세

Mintaka5 2025. 5. 1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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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황제 루트비히4세(Ludwig IV, 1282~1347, 독일왕재위1314~1347, 신성로마재위1328~1347)

  전임 황제 당시 재직 황제 후임 황제
직위 신성로마황제 신성로마황제 신성로마황제
가문 룩셈부르크 비텔스바흐 룩셈부르크
명칭 하인리히7세
Heinrich VII
루트비히4세
Ludwig IV
카를4세
Karl IV
생몰년도 1273.xx.xx ~ 1313.08.24 1282.04.01 ~ 1347.10.11 1316.05.14 ~ 1378.11.29
재위 로마왕(독일왕)
1308.11.27 ~ 1313.08.24
로마왕(독일왕)
1314.10.20 ~ 1347.10.11
로마왕(독일왕)
1346.07.11 ~ 1378.11.29
신성로마황제
1312.06.29 ~ 1313.08.24
신성로마황제
1328.01.17 ~ 1347.10.11
신성로마황제
1355.04.05 ~ 1378.11.29

신성로마황제 루트비히4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282년 신성로마제국 뮌헨에서 아버지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2세(Ludwig II von Bayern, 1229~1294, 재위1253~1294)와 어머니 합스부르크의 마틸다(신성로마황제 루돌프1세의 딸, Matilda of Habsburg, 1253~1304)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신성로마황제중 최초로 비텔스바흐가문 출신 황제이다. 외할아버지인 신성로마황제 루돌프1세로 인해 합스부르크가문과 피가 섞인 인물로 아버지인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2세가 사망하고 친형 루돌프와 공동재위를 하지만 형의 견제로 제국 내 요직을 맡지 못하다가 형의 영향력이 떨어지고 나서는 비로소 제국 내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까지 올라간다. 황제로 등극하기까지 여러 시련들이 존재했고 황제가 되는데 반대표를 던진 형 루돌프와도 지속적인 분쟁을 겪어오다가 화해는 하지만 사촌이자 대립군주가 된 프리드리히1세와도 오랜 분쟁을 겪어오다가 조카 아돌프까지 사망한 이후 1329년 나사우 조약으로 골육상쟁을 마무리 짓게된다. 교황 요한22세와도 대립하여 루트비히4세가 직접 이탈리아를 침공해 로마까지 입성하여 대립교황 니콜라오5세를 선출시키기까지 하는 극한의 대립을 보인다.     

 

정치

I. 혼란

비텔스바흐가 출신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까지 섞인 인물인데, 이는 어머니 마틸다가 신성로마황제 루돌프1세(Rudolf I, 1218~1291, 재위1273~1291)의 딸이였기 때문에 루트비히4세는 루돌프1세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루트비히가 12세이던 무렵인 1294년, 아버지 바이에른의 루트비히2세가 사망해버리면서 아직 어린 나이로 인해 외할아버지가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 궁전인 빈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지내면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1301년 19세의 나이로 이미 형 루돌프(Rudolf I of Bavaria, 1274~1319, 재위1294~1317)가 아버지를 이어 공작이 되어 통치하던 바이에른 공국의 섭정 공작이 되어 공동통치를 하게 되는데 형은 신성로마제국 내에 동생이 영향력을 미쳐 자신보다 더 높게 올라가는 것을 경계했지만 뜻대로는 되지 않았는데, 사실상 대공위시대(1250~1312)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루돌프는 1298년 스스로 황제라고 부르짖던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Adolf von Nassau, 1250?~1298)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루트비히의 외삼촌 알브레히트1세(Albrecht I, 1255~1308, 로마왕재위1298~1308)로 인하여 루돌프는 제국 정계내에서 영향력이 감소하게 되면서 형의 방해로 정계 진출을 하지 못했던 루트비히에게 정계 진출이라는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알브레히트1세가 1308년 암살당하면서 자리를 두고 형 루돌프와 싸움이 일어나버려서 반목이 일어나는데,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7세(Heinrich VII, 1273~1313, 로마왕재위1308~1313, 신성로마재위1312~1313)의 중재로 1313년 형과 화해를 하면서 우호관계를 맺게 된다. 

 

II. 황제선출

그러나 1313년 황제 하인리히7세마저 승하해버리면서 다시 공석이 된 신성로마황제자리를 두고 제국 내 선제후들의 관심이 쏠리게 된다. 루트비히는 형 루돌프를 제치고 황제 후보에 올라 유력한 황제 후보였던 상대이자 외사촌인 프리드리히(외삼촌 알브레히트1세의 아들, 합스부르크 가문)와 경쟁하여 황제로 선출되어 신성로마황제 루트비히4세로 즉위하게 되지만 외사촌 프리드리히가 쾰른에서 대관식을 올려버리는 바람에 대립군주 프리드리히1세(Fredrich I, 1289~1330, 대립로마왕1314~1325)로서 수년간 대립하는 사이가 된다. 특히 루트비히는 대부분의 제국내 선제후들이 자신을 뽑았는데 반해 형 루돌프는 사촌 프리드리히를 뽑음으로 인해 방해가 되는 세력으로 규정하고 정치 보복을 단행하여 형 루돌프가1319년 사망하고 루돌프의 아들이자 루트비히의 조카인 라인 백작 아돌프(Adolf of the Rhine, 1300~1327, 재위1319~1327)가 1327년 사망할때까지 분쟁을 계속 이어가다가 1329년 8월 4일 파비아 조약(The treaty of Pavia, 1329.08.04)으로 형제간의 골육상쟁이 마무리된다. 

 

 

교황 요한22세

루트비히4세는 신성로마황제로 등극하기 이전 사촌인 프리드리히와 경쟁할 때 교황 요한22세(Ioannes PP. XXII, 1244~1334, 재위1316~1334)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요한22세는 이 두사람의 분쟁을 해결하기 전까지 루트비히에게 황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금지령을 내리게 되면서 이에 분노한 루트비히4세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졸지에 교황권(교황파 구엘프)과 황제권(황제파 기벨린)간의 대립이 되어버린 상황에 루트비히4세는 1328년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해 로마에 입성하고 피에트로 라이날두치를 요한22세의 대립교황 니콜라오5세(Nicolas V, 1258~1333, 대립교황재위1328~1330)로 선출시키며 본보기를 보인다. 이는 당시 교황 요한22세는 아비뇽 유수(1309~1377)기간의 2번째 교황으로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 머무르고 있었기때문에 가능한 것이였는데, 그러나 당시 로마엔 교황파 구엘프가 우세했기에 루트비히4세가 대립교황 니콜라오5세를 선출시키고 다시 로마를 빠져나갈때 니콜라오5세가 체포되면서 원래상태로 다시 되돌아온다.  

 

 

승하

1347년 65세의 루트비히4세는 심장마비로 급사해버린다. 이후 후임 황제는 1355년 황제로 선출되는 하인리히7세의 손자 카를4세(Karl IV, 1316~1378, 로마왕재위1346~1378, 신성로마재위1355~1378)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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