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황제 카를7세 알브레히트(독일어Karl VII Albrecht, 영어Charles VII Albert, 1697~1745, 재위1742~1745)
| 전임 황제 | 당시 재직 황제 | 후임 황제 | |
| 직위 | 신성로마황제 | 신성로마황제 | 신성로마황제 |
| 가문 | 합스부르크 | 비텔스바흐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명칭 | 카를6세 Charles VI |
카를7세 Charles VII |
프란츠1세 Francis I |
| 생몰년도 | 1685.10.01~1740.10.20 | 1697.08.06~1745.01.20 | 1708.12.08~1765.08.18 |
| 재위 |
신성로마황제 1711.10.12~1740.10.20 |
바이에른 선제후 1726.02.26~1745.01.20 |
로렌공작 1729.03.27~1737.07.09 |
| 신성로마황제 1742.01.24~1745.01.20 |
신성로마황제 1745.09.13~1765.08.18 |

출생
1697년 스페인령 네덜란드 브뤼셀(Brussels)에서 아버지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2세(Maximilian II of Bavaria, 1662~1726, 재위1679~1726)와 어머니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Teresa Kunegunda Sobieska, 1673~1730)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바이에른 출신으로 신성로마황제 요제프1세의 딸 마리아 아말리아(Maria Amalia, 1701~1756)와 결혼하였고, 1726년 아버지 선제후 막시밀리안2세가 사망하면서 바이에른 선제후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1713년 신성로마황제 카를6세(Charles VI, 1685~1740, 재위1711~1740)가 발표한 국사조칙(합스부르크 세습령과 신성로마황제령에서 남자 상속자가 없을 경우 여자도 상속권을 가진다는 칙령)에 딱히 별 의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후 1740년 카를6세가 사망하고 그의 첫째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 여왕재위1740~1780)가 세속 받게 되면서 카를 알브레히트가 계승을 반대하면서 같이 반대를 외치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합스부르크 가문과 전쟁을 벌이다가 1742년 황제로 선출된다.
초년
스페인령 네덜란드 브뤼셀(현재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다가 1699년 이복형이자 스페인 왕위계승자로서 아스투리아스 공작이였던 요제프 페르디난트 레오폴트(Joseph Ferdinand Leopold, 1692~1699)가 갑자기 사망해버리면서 1700년 국가간 분할 조약이 체결되었다가 프랑스 왕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의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미래의 스페인 왕 펠리페5세)를,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1세(Leopold I, 1640~1705, 재위1658~1705)의 아들 카를(미래의 신성로마황제 카를6세)을 내세우면서 양국의 다툼은 전쟁으로 발전되어 결국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2세(Carlos II, 1661~1700, 재위1665~1700)가 사망하면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아버지 막시밀리안2세도 왕위계승전쟁에 뛰어들었다가 패배하고 여러 국가를 망명해 다니면서 카를 알브레히트는 어린 나이에 부모와 오랫동안 떨어져 살게 된다. 1714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끝난 뒤 1715년 다시 카를의 가족들은 바이에른으로 돌아와 살게 된다. 이후 카를 알브레히트는 군에 복무하면서 오스트리아-오스만제국 전쟁에 참전하기도 한다.
왕위
아버지 막시밀리안2세 선제후가 1726년 사망하고 카를 알브레히트가 새 선제후에 오르게 된다. 즉위하여 신성로마제국을 이끄는 합스부르크가와 프랑스 부르봉 왕가 모두에 우호를 다지기위한 정책을 추진하지만,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사람들이 계승하는 신성로마황제자리를 획득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기위함이였다. 1722년 10월, 신성로마황제 요제프1세(Joseph I, 1678~1711, 독일왕재위1690~1711, 신성로마재위1705~1711)의 딸 마리아 아말리아(Maria Amalia, 1701~1756)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결혼한다.
국사조칙
카를 알브레히트의 장인인 신성로마황제 요제프1세(Joseph I, 1678~1711, 독일왕재위1690~1711, 신성로마재위1705~1711)에겐 딸만 둘 있었는데,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가문은 살리카법을 적용하기 때문에(살리카법에 의하면 여성은 황위상속을 할 수 없다)사실상 요제프1세의 다음 황위는 요제프1세의 딸들(그마저도 둘째딸 마리아 아말리아는 모든 상속을 포기하고 카를 알브레히트에게 시집감) 이 아니라 요제프1세의 동복동생인 카를(미래의 카를6세)로 확정되었고, 1711년 천연두로 요제프1세가 사망하고 스페인을 포기하겠다는 조건으로 황위에 오른 카를6세(Charles VI, 1685~1740, 재위1711~1740)는, 카를6세는 형이 딸만 둘을 낳은 것을보고 미래에 카를 자신마저 아들을 낳지 않게되어 계승이 단절된다면 여자 후손이 계승할 수 있다는 '국사조칙(Pragmatic Sanction, 1713.04.19)'을 발표한다. 국사조칙에 의거하면 남자 후손이 없을 경우, 가문의 수장의 딸이 맡고 딸이 없다면 누이, 누이가 없다면고모까지가문을 이어받도록 하는 조항으로 인해 사실상 요제프1세의 딸들은 카를6세의 딸들보다 더욱 계승순위에서 멀어지게 된다. 카를 알브레히트는 이러한 조칙에 별다른 이의는 없었다.
황제
그러나 1740년 카를6세가 사망하고 1713년 발표된 국사조칙에 따라 카를6세의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 여왕재위1740~1780)가 신성로마황제위를 뺀 나머지(살리카법으로 인해 여자는 황제는 될 수 없었다) 세습령을 계승받게 되면서 카를 알브레히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에 반대하여 같이 반대를 하던 프랑스와 손잡고 공격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이 발발한다. 카를 알브레히트는 1741년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보헤미아 수도 프라하를 점령하였고 프라하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보헤미아 국왕이 되고 공석이던 신성로마황제직을 1742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선제후들을 소집해 선거를 한 결과 황제로 선출되어 카를7세로 명명하고 즉위하게 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합스부르크 가는 앙숙이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2세(Friedrich II, 1712~1786, 재위1740~1786)와의 전투에서 져서 빼앗겼던 슐레지엔 영토를 인정하겠다는 거짓 강화를 맺고 후방을 안정화시킨 바이에른과 프랑스 연합군을 상대하기에 용이하게 된다. 이러한 행보에 카를7세의 연합군대는 점차 합스부르크 제국군에 밀려 역으로 영지가 공격당하는 처지까지 되어버린다.
사망
수세에 몰린 카를7세는 자신의 영지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까지 점령당하는 수모까지 겪으면서 전쟁중 얻은 통풍이 점점 더 심각해져 1745년 1월 20일 48세의 나이에 사망한다. 후임 신성로마황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랑수아 에티엔이 프란츠1세로 즉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