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군주(927~1707), 고위귀족/랭커스터 왕조

헨리4세

Mintaka5 2024. 12. 2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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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IV, 1366~1413, 재위1399~1413

헨리4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366년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볼링브로크 성에서 아버지 곤트의 존(에드워드3세의 셋째아들, John of Gaunt, 1340~1399)과 어머니 랭커스터의 블랑쉐(Blanch of Lancastre, 1342~1368)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남.

 

배경

잉글랜드 랭커스터 왕조를 개창한 군주. 잉글랜드의 왕이 되기 전 이름은 헨리 볼링브로크(Henry Bolingbroke)로 랭커스터 가문 소속이였다. 아버지 곤트의 존이 랭커스터 왕조의 시조였기때문이였는데, 곤트의 존은 백년전쟁(1337~1453)에 참전하여 1367~1374년까지 잉글랜드 군 지휘관으로 복무하여 나헤라 전투, 리모주 공방전등에서 승전을 거두는등 전공을 올리고 잉글랜드로 복귀한다. 

헨리 볼링브로크는 할아버지 에드워드3세(Edward III, 1312~1377, 재위1327~1377)를 이어 사촌(에드워드3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 리처드)이였던 리처드가 리처드2세(Richard II, 1367~1400, 재위1377~1399)가 즉위했지만 10세에 불과한 리처드2세를 대신해 아버지 곤트의 존이 섭정을 맡게 된다. 

1398년(리처드2세 21년) 헨리 볼링브로크가 왕실에 대항할 음모를 꾸민다는 것에 리처드2세에 의해 10년간 잉글랜드 외부로 추방하라는 지시가 떨어짐에 따라 아버지 곤트의 존이 1399년 병사함에 따라 리처드2세가 랭커스터가의 거대한 영지와 재산을 헨리에게 물려주라는 곤트의 존의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몰수하고 10년추방에서 종신추방으로 변경하는등 사실상 모든것을 박탈한거나 다름없었는데, 리처드2세가 아일랜드로 원정을 떠난 사이에 헨리가 귀족들을 포섭하여 결국엔 리처드2세가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다가 런던탑에 유폐되고 의회에서 리처드2세를 폐위시키기에 이른다. 

그렇게 1399년 헨리 볼링브로크가 헨리4세(Henry IV, 1366~1413, 재위1399~1413)로 즉위하게 된다.

 

어린시절

1377년 할아버지 에드워드3세(Edward III, 1312~1377, 재위1327~1377)가 임종 전에 두 아들(흑태자 에드워드, 곤트의 존)의 손자들(리처드, 헨리 볼링브로크)을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하고 승하한다. 그렇게 에드워드3세를 이어 왕위를 잇게되는 리처드는 리처드2세(Richard II, 1367~1400, 재위1377~1399)로 즉위하게 되고 헨리는 더비 백작 작위를 받게 된다. 

 

청원파의 득세

1386년 아버지 곤트의 존이 파벌간에 평화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다가 현 스페인지역 카스티야로 가서 개인의 왕조를 세우겠다고 떠나기전에 리처드2세의 반대파인 청원파(사실상 곤트의 계열)들을 잉글랜드에 그대로 의회에 두면서 곤란에 처해지다가 청원파5명 대신들에 의해 굴복한다. 1389년 22세가 된 리처드2세는 겨우 친정을 시작하겠다고 공표하면서 안정을 찾는 듯 했다.

그때쯤 곤트가 카스티야에서 돌아와서 표면상 중재를 하게됨으로써 리처드2세와 그럭저럭 잘 지내지만 리처드2세는 계속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데, 청원파쪽에서 1398년 분쟁을 일으키게 되면서 리처드2세는 청원파측 인물들과 헨리 볼링브로크까지 해외로 추방시킨다.

 

반란

그러나 1399년 곤트의 존이 사망하면서 리처드2세는 헨리 볼링브로크에게 넘어갈 영지를 모두 몰수해버림으로서 안심하고 아일랜드 원정을 떠나는데, 이 때를 틈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던 헨리 볼링브로크에겐 한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리처드2세의 왕비 이사벨 드 발루아(Isabelle de Valois, 1389~1409)가 프랑스의 공주이자 프랑스 왕 샤를6세(Charles VI, 1368~1422, 재위1380~1422)의 딸이였기 때문.  다만, 당시 프랑스의 실권은 샤를6세가 아닌 샤를6세의 삼촌인 호담공 필리프(Philippe , 1342~1404)가 잡고 있었고 필리프는 잉글랜드와 분쟁을 원치 않았기에 사실상 리처드2세에 대한 헨리 볼링브로크의 반란을 방지하려고 하던 입장이였는데, 호담공 필리프와반하는 세력이였던 오를레앙의 루이1세(Louis I d'Orleans, 1372~1407)가 헨리에게 접근해 동맹을 맺게 된다.

그렇게 1399년 헨리가 오를레앙의 루이1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랭커스터의 공작이라 칭하면서 가담할 세력들을 만드는데, 아일랜드에 원정가있던 리처드2세가 이를 알고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미 기세는 헨리에게기울었고 리처드2세는 사실상 헨리에게 항복을 하면서 포로신세가 된다. 

1399년 9월, 리처드2세는 왕위를 헨리에게 양위한다는 조서에 서명한 이후 의회로부터 폐위되고,  헨리 볼링브로크가 왕으로 선포되면서 헨리4세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통치가 시작된 이후 나름간의 관대한 조치를 취하며 이전의 반대파들을 회유해 다시 관리로 불러들인다. 그렇지만, 1399년 12월, 리처드2세를 복위시키기 위한 음모가 논의된다. 이들은 대축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리는 축제에서 헨리4세를 암살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움직이지만, 음모가 조기에 발각되어버려 헨리4세가 조치를 취함에 따라 조속히 진압이 된다.

헨리4세는 음모에 가담한 자들의 재판을 직접 주재하며 주동자들은 사형을, 나머지 가담자들은 죽이지까진 않고 용서하여 기용한다.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

I. 규모가 커지다

1399년 당시 헨리 볼링브로크가 리처드2세를 폐위시키고 헨리4세로 즉위했을 때 웨일스인들은 리처드를 지지하고 있었는데 마침 헨리4세 암살음모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웨일스에서 소동이 일어난다. 하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국경지대에 있던 소귀족 오와인 글린두르(?~1415)가 사이에서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마침 레지날드 그레이(Reginald Gray, 1362~1440)와 영지문제로 소송을 벌이고 있었는데, 1399년 리처드2세가 주재했던 법정에서는 글린두르가 승소하지만, 헨리4세가 즉위하면서 헨리4세파였던 그레이가 다시 소송을 벌이면서 오와인이 이에 헨리4세의 명을 따르지 않게 되자 헨리4세가 오와인의 작위와 영지를 몰수해버림으로서 모든 것을 잃은 글린두르가 1400년 9월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헨리4세는 군대를 이끌고 웨일스로 가지만 글린두르의 전술에 휘말려 패배함에 따라 웨일스의 반란군 세력은 더욱 규모가 커진다. 1401년에도 헨리4세의 토벌군은 웨일스의 반란군이 유격전을 구사함에 따라 피해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자 협상을 통해서 해결하자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헨리4세는 반란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강경론을 내세움에 따라 더욱 거세진다.

그러나 글린두르는 이상태로는 잉글랜드의 공세를 오랫동안 버티기 힘들다 판단하여 프랑스와까지 손을 잡고자 하는데, 프랑스입장에서는 눈엣가시인 잉글랜드를 약화시킬 기회라 판단해 도움을 주는데 무기와 식량등을 글린두르에게 지원해준다. 글린두르의 규모가 계속해서 커짐에 따라 잉글랜드 내부 헨리4세에 반하는 무리들끼리도 비밀리에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글린두르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옹립시키려는 시도까지 하게 된다. 이 잉글랜드의 헨리4세 반대무리 우두머리는 헨리 퍼시(Henry Percy, 1364~1403)이다. 그러나 또 발각되면서 주동자전원 처형당한다.

II. 몰락

1400년 반란이후 잉글랜드를 위협할정도로 세가 커졌던 글린두르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부에서 일어나는 다른뜻까지 섞여 점점 그 세력이 약화되다가 1413년 헨리4세 승하이후 즉위한 헨리5세(Henry V, 1386~1422, 재위1413~1422)는 웨일스와 화해를 시도함으로서 글린두르까지 사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사실상 웨일스를 잉글랜드로 귀부시킨다.

 

사망

1410년대에 들어서 병이 듬에 따라 통치까지 힘든지경에 이르면서 장남 몬머스의 헨리(미래의 헨리5세)가 헨리4세를 대신해 섭정통치를 하는데, 1413년 중병으로 앓다가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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