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왕 헨리6세(Henry VI, 1421~1471, 재위1422~1461, 1470~1471)
전임 군주 | 당시 재직 군주 | 후임 군주 | |
직위 | 아키텐 공작, 잉글랜드 왕 | 아키텐 공작, 잉글랜드 왕, 프랑스 왕 | 요크 공작, 잉글랜드 왕 |
가문 | 랭커스터 | 랭커스터 | 요크 |
명칭 | 헨리5세 Henry V |
헨리6세 Henry VI |
에드워드4세 Edward IV |
생몰년도 | 1386.09.16 ~ 1422.08.31 | 1421.12.06 ~ 1471.05.21 | 1442.04.28 ~ 1483.04.09 |
재위 | 아키텐 공작 1399.10.15 ~ 1422.08.31 |
아키텐 공작 1422.08.31 ~ 1453.10.19 |
요크 공작 1460.12.30 ~1461.03.04 |
랭커스터 공작 1399.11.10 ~ 1413.03.20 |
랭커스터 공작 1422.10.21 ~ 1453.10.19 |
잉글랜드 왕 I.1461.03.04~1470.10.03 II.1471.04.11~1483.04.09 |
|
잉글랜드 왕 1413.03.21 ~ 1422.08.31 |
잉글랜드 왕 I:1422.08.31~1461.03.04 II:1470.10.03~1471.04.11 |
출생
1421년 12월 6일, 잉글랜드 윈저 윈저 성()에서 아버지 헨리5세(Henry V, 1386~1422, 재위1413~1422)와 어머니 카트린 드 발루아(Catherine de Valois, 1401~1437)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잉글랜드 왕으로, 백년전쟁(1337~1453)이 한창일 때 태어나 아버지 헨리5세가 36세의 나이로 급사해버리면서 불과1세의 나이로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특히 프랑스인 어머니 카트린 드 발루아가 프랑스 왕 샤를6세(Charles VI, 1368~1422, 재위1380~1422)의 딸이였던 것 만큼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아 사망한 샤를6세의 후임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할 명분을 얻어 1431년엔 프랑스 왕으로도 즉위하여 프랑스 왕 샤를7세(Charles VII, 1403~1461, 재위1422~1461)와 대립하는 군주이기도 하다.
초년과 백년전쟁
태어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버지 헨리5세가 사망함에 따라 1세의 나이로 잉글랜드 왕이 되는 인물이지만 어린 나이로 인해 통치능력이 없었기에 삼촌인 베드퍼드 공작 존(John, Duke of Bedford, 1389~1435, 헨리4세의 3남)과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Humphrey, Duke of Gloucester, 1390~1447, 헨리4세의 4남)가 공동섭정을 맡으며 잉글랜드를 통치하게 된다. 거기다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의 왕으로까지 선포되게 되는데, 이는 아버지 헨리5세가 프랑스 왕 샤를6세사이에 체결한 조약으로, 어머니가 되는 카트린 드 발루아와 아버지 헨리5세가 혼인하게 되면서 동시에 헨리6세를 광인왕으로 정신질환을 앓아 언제 사망할 지 모르던 샤를6세의 후임 프랑스왕으로 점찍기위해 맺은 조약인데, 공교롭게도 아버지 헨리5세가 샤를6세보다 먼저 사망하게 되면서 헨리5세의 계산은 살짝 미스가 나버린다. 프랑스 왕으로 선포된 헨리6세지만 프랑스 왕 샤를6세의 아들 샤를7세(Charles VII, 1403~1461, 재위1422~1461)가 프랑스 왕이 됨을 선포함으로서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된다. 헨리6세는 2명의 섭정인 삼촌들이 사실상 통치하면서 전쟁을 수행하게 하고 프랑스 정통 왕이 누구냐를 두고 샤를7세와 대립하게 되는데, 1429년 샤를7세가 오를레앙 공작 샤를 도를레앙(Charles Ier d'Orléans, 1394~1465) 지원을받고 성녀로 불리는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의 용맹술로 오를레앙을 포위했던 잉글랜드군의 포위를 해체하게 됨으로서 오랜기간동안 프랑스 왕이 즉위식을 거행했던 랭스(Reims)에 입성하여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7세의 대관식을 치르고 이에 질세라 헨리6세도 프랑스 왕국 파리(Paris)에서 프랑스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치른다.
아라스 조약
그러나 1435년 프랑스 왕 샤를7세(Charles VII, 1403~1461, 재위1422~1461)와 적대관계던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3세(Philippe III 'le Bon', 1396~1467, 재위1419~1467)가 아라스 조약()을 체결하면서 평화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잉글랜드는 부르고뉴 공국과의 동맹관계가 깨어져버리면서 1420년 체결한 트루아 조약이 무효가 되어버리고 필리프3세가 샤를7세를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게 된다.
헨리6세의 친정시작
1437년, 본인을 대신해 섭정을 맡고 있던 어머니 카트린 드 발루아(Catherine de Valois ,1401~1437)가 사망하고 당시 성년이 갓 되던 나이인 헨리6세는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하게 된다. 헨리6세는 자신과 대립하던 프랑스 왕 샤를7세와의 좋지않던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1445년, 샤를7세의 사촌동생이였던 르네 당주(René d'Anjou, 1409~1480, 재위1434~1480)의 딸 마르그리트 당주(Marguerite d'Anjou, 1430~1482)와 결혼하면서 두 국가간 평화를 꾀했지만, 헨리6세의 최측근이자 마르그리트 당주와의 혼인동맹을 주선했던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William de la Pole, 1396~1450)이 헨리6세 치세들어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가 감소하고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여론이 악화되고 의회에서 윌리엄이 탄핵되기까지 되어버리면서 헨리6세도 여론을 의식해 어쩔 수 없이 윌리엄을 추방하지만 1450년 배를 타고 망명하는 길에 해적을 만나 살해당해버린다. 거기다가 1451년엔 300년전 헨리2세(Henry II, 1133~1189, 재위1154~1189)때부터 잉글랜드가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 내 거대한 아키텐 공국도 프랑스에 빼앗기게 되고 1453년 보르도까지 상실하면서 프랑스 영토 내 유일하게 칼레만이 남게 되고 1453년 10월 19일 백년전쟁이 공식적으로 종료된다.
장미전쟁
헨리6세는 아키텐에다가 보르도까지 빼앗겼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한다. 사실상 통치가 어려워진 왕을 대신해 헨리5세의 5촌인 요크 공작 리처드(Richard of York, 1411~1460, 리처드3세의 아버지)가 섭정을 맡게 된다. 그러나 헨리6세의 정신질환은 갈수록 심각해졌고 요크의 리처드는 헨리6세가 정신질환으로 섭정이 된 틈을타서 방해되는 세력들을 모두 몰아내고 헨리6세의 지지세력들까지 평정하려고 하면서 헨리6세의 왕비 마르그리트 당주와도 갈등을 일으키고 특히 헨리6세의 기반가문이던 랭커스터가문의 서머셋 공작()을 공격하면서 잉글랜드의 귀족 내전인 장미전쟁(1455~1487)이 발발하게 된다. 그렇게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피튀기는 싸움으로 1460년 요크 공작 리처드는 왕위를 요구까지 하나, 랭커스터가문과의 전투도중 전사하고 1461년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가 랭커스터 가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왕위를 획득하게 되면서 헨리6세가 사실상 폐위된다. 에드워드는 에드워드4세(Edward IV, 1442~1483, 재위1461~1470, 1471~1483)로 즉위하게 된다.
최후
1461년 3월 4일 폐위된 헨리6세는 왕비 마르그리트가 끝까지 저항하지만 그럼에도 헨리6세는 1465년 에드워드4세에 의해 런던탑에 유폐된다. 그러나 요크가의 에드워드4세가 즉위한 이후 내부 정치 불화를 겪으면서 갈등을 일으키다가 1470년 헨리6세를 폐위시키게 하고 에드워드4세를 즉위하게 했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Richard Neville, 1428~1471)이 헨리6세를 런던탑에서 구출하고 에드워드4세를 폐위시킨 뒤 헨리6세를 다시 복위시키지만 1471년 에드워드4세가 네빌의 군대를 물리치고 다시 왕위에 오르면서 헨리6세는 런던탑에 재유폐되고, 1471년 5월 21일 런던탑에서 5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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