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 정도전, 1342~1398
출생
1342년 고려 양광도 단양(현재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1305~1366)과 어머니 영주 우씨 사이에서 태어남. 아우로는 정도존, 정도복이 있다.
배경
여말선초 유학자, 혁명가, 설계자. 조선이라는 국가의 근간을 정도전이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인물. 성리학을 장려한 고려의 몇 안되는 시조급 유학자이며 당시 전횡을 일삼던 권문세족에 대항해 원나라와의 단교, 명나라와의 외교를 주장하면서 수많은 파직과 복직을 당하면서 야인으로 살아가다가 운명적으로 이성계(1335~1408, 재위1392~1398)를 만나게 되면서 인생이 바뀐다.
이후 이성계, 정몽주(1338~1392)등과 함께 1388년 우왕(1365~1389, 재위1374~1388), 1389년 창왕(1380~1389, 재위1388~1389)을 폐위시키고 고려 마지막 군주 공양왕(1345~1394, 재위1389~1392)을 옹립하고 3년뒤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옹립해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으로서 역사에 등장한다.
그러나 공신세력, 왕자들이 가진 사병에 대한 사병혁파 과정에서 마찰을 빚다가 요동 정벌이라는 묘수로 명 초대 주원장(1328~1398, 재위1368~1398)과 대립하던 도중 1398년 1차 왕자의 난으로 정안대군 이방원(미래의 태종, 1367~1422, 재위1400~1418)에게 암살당한다.
목은 이색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1305~1366)은 고려의 관리로서 지방에 머물다가 개경으로 이주하면서 이곡(1298~1351)과 교유관계를 맺었는데 이 이곡의 아들이 목은 이색(1328~1396)이다. 정도전역시 이색과 가깝게 지내면서 교우관계를 맺게되는데, 이후에 정도전이 1360년 진사시에 급제해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 이미 정3품 성균관 대사성이였던 이색과 다시 만나게 된다. 더욱이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 있으면서 역시 이색의 문하생이였던 포은 정몽주와 마음이 잘 맞아 많이 친해진다.
이름 | 생몰년도 | |
이색의 문하생 | 정몽주 | 1338 ~ 1392 |
정도전 | 1342 ~ 1398 | |
이숭인 | 1347 ~ 1392 | |
권근 | 1352 ~ 1409 |
정몽주와는 이색 문하에 있을 때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어 사상적, 학문적으로 많은 교류를 하게 되면서 상호 협력하는 관계가 된다.
반항아
성균관을 거쳐 1362년 문과에 급제하여 1363년(공민왕12년) 만21세로 관직에 진출하지만, 1365년 공민왕(1330~1374, 재위1351~1374)이 신돈(1322~1371)을 기용하게 되면서 관직에 환멸을 느껴 낙향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100일이 아닌 3년간 효(주자가례)를 다 하면서 학문연구를 끊임없이 한다. 1369년까지.
신돈이 축출됨에 따라 1370년 다시 관직에 복귀하면서 스승인 목은 이색이 대사성으로 있는 성균관으로 와서 박사직위를 받게 된다. 성리학 수업을 진행하고 토론하는등 후학양성과 학문연구를 부지런하게 하지만 신돈이 다시 복귀했을 때 전횡을 벌여 물러났다가 1371년 신돈이 완전히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된다.
그러나 1374년 정도전에게 있어서 고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친원파 vs 친명파
그 사건은 1374년 공민왕이 자제위(공민왕의 미남 시위대) 군사 홍륜(?~1374), 최만생(?~1374)에게 시해당해버린 것.. 공민왕은 애초 즉위부터 반원정책을 주요 정책으로 삼아 개혁을 추진해왔는데, 공민왕이 시해당함으로서 고려는 다시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을 일삼게 되며 분열을 거듭하는데, 정도전과 정몽주등 신진사대부들은 사상적 지주격 국가인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주장하고 이미 고려의 권력과 경제권을 독점한 친원파 세력인 권문세족들과 마찰을 빚게 된다.
정도전을 포함한 신진사대부들은 권문세족들이 독점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서 권문세족들도 이들을 가만두지 않고자 계획을 짜는데..
1375년(우왕1년), 북원에서 고려로 사신이 당도하는데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간 대립이 발생한다. 정도전을 주축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은 북원사신이 고려로 오는 것 자체를 반대하며 당시 수문하시중 이인임(1312~1388)에게 주장하지만 이인임은 그대로 북원사신을 맞이하려고 하는데 사신 영접사에 정도전을 임명하려고 하자 강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한 정도전은 이인임을 포함한 권문세족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서 유배형을 받아 유배를 떠나게 된다.
2년간의 유배생활 후 1377년 유배가 풀리고 야인으로서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도중에도 권문세족들의 전횡은 지속되는데.. 고려라는 국가가 전복되기 직전의 상황임을 인식하고 정도전은 고려를 다시 개혁해야할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이성계
I. 동북면으로 가재이
야인생활이 지속되던 1383년, 정도전은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1335~1408, 재위1392~1398)를 찾아간다. 백전불패 이성계의 명성을 벗인 정몽주로부터 듣고 고려의 영웅대접을 받던 이성계를 직접 찾아가 고려를 구하기 위한 명분으로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는데 정도전은 이성계의 지휘력,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실히느꼈던 것 같다. 이성계 역시 정도전과의 대화로 그의 사상과 국가경영관에 대한 내용에 감탄하며 정도전과 협력하기로 마음먹는다.
II. 위화도회군
1388년 여름 장마시즌, 요동정벌에 출정한 우군도통사 이성계(1335~1408, 재위1392~1398), 좌군도통사 조민수(1324~1391)등이 군사를 사지로 내모는 고려 정부의 뜻을 도저히 받들 수 없어 위화도 회군을 시도하게 된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이 권문세족들의 수족을 잘라내면서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이색, 정몽주와 의견이 갈리게 되면서 점점 멀어지고 정도전은 우왕의 측근세력과 이인임계 권문세족들을 제거함으로서 새로운 국가를 열기위한 초석을 닦는다.
그렇게 우왕역시 폐위되고 우왕의 아들 창왕(1380~1389, 재위1388~1389)이 즉위하게 된다.
III. 신우 신창
1389년 폐위된 우왕이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 사실이 곽충보(?~1403)의 고변으로 발각됨에 따라 이성계는 폐위된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유배보낸다. 이성계와 같은 팀인 정도전역시 우왕을 신돈의 첩인 반야의 소생, 창왕역시 신돈의 자손으로서 왕우, 왕창이 아닌 신우, 신창이라고 몰아세우는 우창비왕설을 제시한다.
이에 창왕까지 폐위되고 이성계, 정도전 일파들이 고려20대 신종(1144~1204, 재위1197~1204)의 7대손인 정창군 왕요를 공양왕(1345~1394, 재위1389~1392)을 옹립시킨다.
정몽주
공양왕이 즉위하지만 이미 실권은 이성계 일파들이 잡고있던 실정이라 공양왕은 할 수있는게 없었다. 갈수록 세력이 커져가는 이성계세력이 고려를 전복시킬 수 있다고 여긴 정몽주는 이성계일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정도전을 탄핵시킨다. 정몽주는 이 기회에 아주 정도전을 처형시킬려고 공양왕의 재가를 받으러가지만 처형만은 안된다는 공양왕의 주장을 받들어 1392년 초 정도전은 다시 풀려난다.
그러나 얼마뒤 이성계가 사냥터에서 낙마사고를 당해 거동이 어려워지는상태가 됨에 따라 조당에 참석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정몽주는 천운이 온 것이라 판단하고 아예 이성계 일파세력을 모두 숙청해버리겠다는 의지를 다지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 이성계의 5남 이방원(미래의 태종, 1367~1422, 재위1400~1418)이 등장해 이성계를 개경으로 데려오면서 그계획도 무산되버린다.
이에 이방원은 아예 정몽주를없애기로 마음먹는데 그전에 한번더 회유를 하기위해 하여가를 읊지만, 단심가(정몽주 게시물 참조)로 그 제안을 거절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무참히 살해한다. 이렇게 무너지는 고려를 지탱할 마지막 버팀목이 사라지면서 구심점을 잃게 된다.
조선 건국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당하고 거의 곧바로 정도전이 풀려나고 정계에 복귀함에따라 고려를 전복시키고 새 왕조를 열기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된다. 그렇게 1달 뒤,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선위하는 방식으로 내려옴에 따라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열게 된다. 1등공신으로서 조선의 요직들을 겸임하게되면서 사실상 이성계에 버금갈만한 권력을 손에 쥔다. 정치를 잘 모르던 무반 출신인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조정일을 거의 대부분 맡기게 되면서 정도전의 영향력은 실로 어마무시해진다.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 기지 설정, 도성내부 기관, 장소에 대한 명칭 설정등 거의 모든 전반에 대한 업무를 담당후 결정하여 시행함에 따라 조선의 기틀을 차곡차곡 쌓게 된다.
왕자의 난
그러나 정도전은1396년 3차 요동정벌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는데, 이미 조선이 건국되기 전 명 태조 주원장이 고려에 철령 이북땅을 명나라에 반환하라라는 일에 대한 반감이 있었는데,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명이 조선을 견제하는 것이 차원이 다르게 강화됨에 따라 조선역시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정도전의 마음).
정도전은 이에 개국공신들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사병을 혁파에 국가의 군대로 전환시켜 요동정벌에 투입할 계획을 하게 되는데, 이에 수많은 반발이 이어지면서 갈등을 일으키는데 결국 이에 정안대군 이방원(미래의 태종)을 주축으로 한 세력들이 먼저 정도전 일파를 없애겠다는 계획을 발빠르게 시행함에 따라 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게 된다.
남은의 사저에 있던 3인방(정도전, 남은, 심효생)등은 요동정벌 처리문제로 논의중이였는데, 정안대군이 이를 급습함으로서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 때가 1398년 8월.
그렇게 정도전이 암살됨에 따라 역적으로 몰려 이름을 올려선 안될 인물로 무려 500년에 가까운 시기가 지나고 26대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대에 들어서 복권됨에 따라 신원이 회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