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Seong Hon, 1535~1598)
출생
1535년 조선 한성부 순화방에서 아버지 성수침(1493~1564)과 어머니 파평 윤씨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남.
배경
아버지 성수침 밑에서 학문을 배우고, 백인걸(1497~1579)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이 때 평생 친구가 되는 율곡 이이(1536~1584)를 만나게 된다. 서인의 대표적인 인물. 1590년 좌찬성으로 공식 은퇴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다시 복귀하게 되는데..
초년
현량과로 천거되었지만 기묘사화(1519)이후 벼슬을 사양했던 아버지 성수침의 독남으로서 은거했던 아버지 아래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휴암 백인걸(1497~1579)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운다. 백인걸은 사림파였던 조광조(1482~1520)의 제자. 그러다가 1551년(명종6년)에 생원시, 진사시 모두 급제(1단계 초시 합격) 하지만 당시 병을 앓고있던 터라 2단계 시험인 복시에는 응시를 못하게 되면서 급제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당시 대학자인 퇴계 이황(1502~1571)과 남명 조식(1501~1572)등을 찾아가서 학문적 토론을 하기도 한다.
이 이후에도 계속 스승 백인걸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우면서 평생의 동지인 율곡 이이(1536~1584)를 이곳에서 사귀게되면서 많은 교류를 나누게된다. 조광조의 제자였던 스승 백인걸과 아버지 성수침의 가르침을 받아 조광조의 학통을 이어나가게 되는데, 성혼역시 육체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학문또한 성장하면서 연구와 더불어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성혼의 대표적인 문하생들로는 다음과 같다.
생몰년도 | 직책 | |
김상용 | 1561~1637 | 정1품 우의정 |
김자점 | 1588~1651 | 정1품 영의정 |
김장생 | 1548~1631 | 종2품 형조참판 |
김집 | 1574~1656 | 종2품 공조참판 |
오윤겸 | 1559~1636 | 정1품 영의정 |
윤황 | 1572~1639 | 정3품 이조참의 |
이귀 | 1557~1633 | 정2품 이조판서 |
이시백 | 1581~1660 | 정1품 영의정 |
정엽 | 1563~1625 | 정2품 우참찬 |
정철 | 1536~1594 | 정1품 좌의정 |
조헌 | 1544~1592 | 성균관 교수, 의병장 |
황신 | 1562~1617 | 정2품 호조판서 |
관직
1561년, 1564년 모친과 부친이 사망하면서 총 6년간의 상을 치르게 된다. 부친상을 치를 당시 1565년에는 소윤 윤원형(1503~1565)등의 외척세력이 문정왕후(1501~1565)사후 몰락하게 되면서 훈구가 몰락하고 사림이 다시 등용되는 시기였는데, 1565년 명종(1534~1567, 재위1545~1567)마저 승하하면서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게 되는 등 급변하는시기에 상을 치뤘다.
1568년(선조1년)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가 종2품 경기도 관찰사인 윤현(1514~1578)에게 유일(遺逸, 초야에 재능있는 선비를 천거하는 제도)의 선비를 천거하라고 명령하는데 그에 성혼을 천거해 전생서 참봉(종9품)직위를 선조로부터 하사받는다. 이후로도 선조의 총애를 받고 계속 벼슬을 하사받지만 모두 사양하고 이전처럼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집중한다.
그렇게 계속 벼슬을 모두 거부하고 연구와 제자양성에만 몰두하다가 1575년 을해당론(이조전랑임명문제로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하다가 김효원의 동인, 심의겸의 서인으로 분당되는 일)이 터지게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 활동하는 기행을 보이기도 한다. 궁에 관직을 맡고있을 때에는 심지어 녹봉자체를 받지 않아 선조가 따로 미곡을 챙겨줬을 정도지만 그 미곡또한 이웃사람들이나 친척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본인에게는 딱 필요한 만큼만 사용했다고 한다.
기축옥사
이후 1583년 병조참지(정3품)에 임명되어 다시 한성부로 상경해와서 이번에는 관직을 받고 이조참의(정3품), 1589년 이조참판(종2품)등으로 오르게 된다. 1584년 평생의 친구 율곡 이이(1536~1584)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서인의 영수가 되지만워낙 동인의 공격도 많이받고 관직에 뜻이 없던 터라 사직상소를 올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1589년 정여립(1546~1589)의 모반사건이 터지게 되면서 급하게 한성부로 올라가게 되는데 이 사건이후 수많은 동인이 피를 흘린 기축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되면서 이조참판(종2품)에 오르게 되는데 동지이자 제자였던 정철(1536~1594)의 동인 일망타진에는 극구 반대를 하며 사건이 확대되기를 원치않았다. 성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철이 동인의 최영경(1529~1590)의 구원을 반대하면서 성혼의 아들(성문준)과 성혼의 문하생들이 최영경을 위문하러 가지만, 이를 의심한 최영경을 괘씸하게 본 성혼의문하생들이 최영경을 탄핵해버려 곤장을 맞던중 사망해버리면서 모든 화살이 성혼에게 쏠리게 된다.
이에 성혼은 다시 사직 상소를올려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가서 학문 연구, 제자양성에 몰두한다. 이후 기축옥사는 1591년 앞서 언급한 최영경의 옥사문제로 동인측의 강렬한 비판을 받고 정철(1536~1594)을 실각시키고 처벌하는 문제로의견이 갈려 동인 내에서 남인(정철 살리자)과 북인(정철 죽이자)으로 나뉘면서 화합은 더욱더 멀어지게 된다.
임진왜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조정의 소식을 들어오던 성혼은 파죽지세로 치고올라오던 왜군으로인해 북쪽으로 피난을 가고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이 평안도 성천으로 분조를 옮길때 성혼역시 광해군을 만나 선조가있는 의주 행재소로 달려가지만 광해군을 보고 왔다고 또 대신들의 비난의 목소리가 커진다. 이에 성혼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대죄하는 서신을 쓰고 그와 동시에 선조에게 임진왜란을 대비할 계책들을 고하게 된다.
이후 정2품 우참찬, 종2품 대사헌등에 임명되면서 의병장들을 돕고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을 도와 임진왜란에 대한 방비를 하게 된다.
1594년 좌참찬으로 오르고 편의시무14조를 올리지만 시행되지는 못했다.
영의정 류성룡(1542~1607)과 왜나라에 대한 강화를 주장했다가 선조와 동인들의 규탄을 제대로 받게 되면서 다 물러나게 된다.
사망
1594년 걸해소(乞骸疏, 나이든 관인이 사직을 원하는 상소)를 올려 아예 은둔해버리면서 다시 고향 파주로 와서 학문연구, 제자양성등으로 1598년 죽을때까지 여생을 보낸다.
1598년 63세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