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영, 1776~1846
출생
1776년 아버지 조진관(1739~1808)과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배경
풍양 조씨가문으로 수대에 걸쳐 고위직이 배출되었다. 조만영의 조부는 정2품 조엄(1719~1777)으로,조선에 고구마를 들여온 인물이다. 노론 벽파 출신으로서 아버지 조진관은 정2품 판서직을 역임하면서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승하후 순조(1790~1834, 재위1800~1834)대에 들어 눈에 띈다. 조만영의 딸(추존 신정왕후)이 1819년 효명세자(추존 문조, 1809~1830)의 세자빈으로 입궁하게되고 이후 신정왕후가 이환(미래의 헌종, 1827~1849, 재위1834~1849)을 낳게되면서 조만영은 헌종이 1834년 즉위하게 되면서 왕실의 외척이 되어 세도정치를 행하게 된다.
헌종의 외할아버지
1813년(순조13년), 비교적 늦은나이인 37세에 문과에 급제해 정9품 예문관 검열로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관직생활을 한창 하고있던 1819년(순조19년), 자신의 딸이 효명세자(순조의 아들, 1809~1830)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궁에 입궐하게되는데, 1827년 한창 조정은 김조순(1765~1832)을 주축으로 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만연했는데, 조만영은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게되면서 고속 승진을 하게되어 정2품 판서, 종1품 판의금부사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1830년 효명세자가 21세의 나이로 병사하면서 풍양 조씨 세력이 주춤해지지만, 조만영은 핵심요직에 남아 3세의 어린 세손(헌종)을 보호하기위해 힘을 쓴다. 1834년 순조가 승하하고 헌종(1827~1849, 재위1834~1849)이 즉위하게 되면서 조만영은 헌종의 외할아버지로서 왕실외척의 최고어른이 되며 풍은부원군에 봉해진다. 같은 파 인물들과 친족들을 판서직에 앉혀놓는등 세력확장을 도모한다.
천주박해
안동 김씨 세도세력이 사학이였던 천주교를 믿는 천주교도들에 대한 처분을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미온적인 태도로 처리함에 따라 이에 대한 상소가 연일이 올라오게 되면서 불만이 쌓이게 되자, 조만영은 이를 안동 김씨 세도세력을 꺾기 위한 기회로 삼게되는데.. 마침 안동 김씨 세력중 순원왕후(당시 대왕대비, 1789~1857)의 오빠인 김유근(1785~1840)은 시파로서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지녔었는데, 유진길 아우구스티노(1791~1839)를 소개받고 천주학에 관심을 갖고 세례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신정왕후 조씨(1809~1890)의 최측근 우의정 이지연(1777~1841)이 김유근의 천주교에 관한 일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때마침 1834년 순조가 승하하면서 헌종이 즉위해 풍양 조씨가 집권하게 되면서 이들을 처벌해야한다는 의논이 발생하게 된다. 이에 천주교도들을 모두 척결하라는 명이 떨어짐에 따라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붙잡혀 처형을 당한다. 1839~1840년까지 2년간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당한다. 이를 기해박해라고 한다.
조만영의 동생 조인영으로 하여금 [척사윤음]을 전파해 천주박해에 대한 명분을 세워 이단을 척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이에 반해 천주교를 변호한 정하상 바오로(정약종의 아들, 1795~1839)가 [상재상서]로서 천주교의 정통성, 올바른 윤리, 미덕등을 전달하여 사학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말년
그렇게 1834년부터 정권을 쥔 풍양 조씨의 수장격인물인 조만영은 1845년 궤장(70세 이상의 나이든 대신에게 내린 하사품)을 하사받고, 정1품 영돈녕부사에 임명돼 국구로서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지만 풍양 조씨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면서 아들이 갑자기 죽는등으로 충격을 받아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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