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재임1959~1969)
전임 (4공화국) | 초대 5공화국 대통령 | 후임 (5공화국) |
르네 코티 Rene Coty 1954~1959 |
샤를 드 골 Charles de Gaulle 1959~1969 |
조르주 퐁피두 Georges Pompidou 1969~1974 |

출생
1890년 프랑스 북부 오드프랑스(Haut de France)주 릴(Lille)에서 아버지 앙리 드 골(Henri de Gaulle, 1848~1932)과 어머니 잔느 마이오(Jeanne Maillot, 1860~1940)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배경
명실상부 프랑스 국부이며 2차대전(1939~1945)당시 영국에서 프랑스 임시정부 주석으로 레지스탕스를 지휘하고 프랑스를 나치독일로부터 구하기위해 직접 고군분투한 인물이다. 군인으로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장교가되어 1차대전, 2차대전등에 참전했다. 2차대전 이후 정계에 진출해 1958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됨과 5공화국을 선포하면서 현재까지 지속된다.
군인의 길
I. 1차대전
1909년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생시르 육군사관학교(École Spéciale Militaire de Saint-Cyr)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1년동안 근처 부대에서 이등병에서부터 의무 복무를 해야했다(사관학교 들어가기위한 관문정도?). 그렇게 1년을 병사로 복무하고 1910년 정식으로 사관생도가 되었고 1912년 22세가 되던해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배속된다. 근무지는 제33보병연대. 이곳 33보병연대 연대장이 드골의 멘트이자 이후 2차대전당시 비시 프랑스 수장이되는 필리프 패탱(Philippe Pétain, 1856~1951, 비시프랑스재임1940~1944)대령이다. 그리고 2년뒤 1914년 벌어진 1차세계대전(1914. 07~1918. 11)에 중위계급으로 참전한다. 1915년 2월 대위로 진급한 드골에게 시련이 닥친다. 베르됭 전투라는 1차대전 최대 격전지에서 10개월간 독일군과 싸워 프랑스군이 승리하게 되지만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만 40만명이상의 사상자가 나오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3달후 1916년 3월 두아몽에서 드골의 대대가 전멸하면서 적진을 탈출하다가 포로가 되어버리는데 1918년 11월 1차대전이 끝날때까지 2년8개월(32개월)동안 포로 수용소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수치스러움을 참을 수 없었던 드골이 5번씩이나 탈출을 감행하지만 실패해버리고 만다. 1918년 11월 독일 제국의 항복으로 1차대전이 끝날때까지 드골은 계속해서 포로수용소에서 있게 되다가 저 때 석방된다.
II. 1차대전 이후
1918년 11월 포로생활에서 벗어나게 된 후 폴란드에 파견되어 교관을 맡다가 프랑스로 돌아와 모교인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수를 맡는다. 드골은 1915년 대위진급이후 소령진급까지 12년이 걸리는데, 군 내부에서 드골이 너무 독선적이고 오만했다는 점에서 주변사람들의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진급이 계속 누락되었던 것이였지만, 그래도 능력이 있던 탓에 1927년 소령으로 진급하긴 하지만 물론 군 초기부터 알아오던 페탱원수의 천거로 진급한 것이기도 하다. 1927년 소령을 시작으로 독일 국경쪽 라인란트 점령군(비무장지대)에서 복무하면서 독일의 재침공 가능성을 확인하지만(1936년)그때당시도 소령으로서 계급이 10년가까이 정체되어있는다. 1936년 나치 독일 히틀러(1889~1945)가 라인란트 재무장을 시도하면서 베르사유 조약을 위배함과 동시에 군비 증강과 군사력 증강이 현실로 드러나게 되는데, 프랑스 보수파 정치인들은 라인란트 남부 프랑스-독일 국경지대에 마지노선만 설치하고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게 된다.
III. 2차대전
1939년 9월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는데 폴란드가 단 일주일만에 떨어지고 1940년엔 프랑스를 침공하게 되는데, 1939년 기갑여단장이되면서 전장에 투입된다. 나치독일은 프랑스 침공계획이 2개의 루트가 있었는데, 첫째는 벨기에에서 네덜란드로 연합군을 유인하고 파리를 점령하는루트, 둘째는 국경지대에 설치된 마지노선을 측면으로 공격해 무력화 시킨다음에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였는데, 두번째 루트가 실행되면서 1달도 되지않아 파리가 점령되어버린다. 이후 파리점령 일주일만에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1856~1951, 비시프랑스재임1940~1944)원수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게 되면서 휴전관계에 들어가게 되어버린다.
망명정부
1940년 프랑스가 나치에 항복하면서 드골은 영국 런던으로 망명해서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를 결성하게 된다(1940년 6월18일). 사실상 프랑스는 항복 제3공화국이 붕괴되고 북부 나치 점령지역, 필리프 페탱을 원수로 삼은 비시 프랑스라는 나치 독일 괴뢰국이 설치됨으로서 드골은 프랑스 본토에서는 통제가 너무 극심해 자유 프랑스를 지지하는 프랑스령과 함께 아프리카에 자유프랑스 세력을 장악해 나가지만, 여러 내분과 위기를 겪으면서 본부가 2번이나 옮겨간다.
자유프랑스 임수도 | |
1940 | 런던 |
1940~1942 | 브라자빌(콩고의 수도) |
1942~1944 | 알제 |
1942년 미-영간 횃불 작전으로 북아프리카 모로코에 상륙하게 되면서 비시프랑스군과 한바탕 전투를 벌여 연합군이 승리한다. 그 이후 비시프랑스령이였던 모로코와 알제리까지 자유 프랑스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1942년 콩고 브라자빌에서 알제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나치로부터 해방
자유 프랑스의 세력이 점차 늘어감에 따라 프랑스 본토 내 레지스탕스 운동이 점점 강화됨에 따라 프랑스의 해방도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데, 1944년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상륙작전(병력 약16만명) 을 펼쳐 성공한 이후 파죽지세로 프랑스 내륙으로 진격하면서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가 파리 내 레지스탕스와 파리 시민들의 협조를 받아 개선한다.
프랑스 권력
1945년 2차대전이 종전됨과 프랑스를 전후로부터 안정화시키기 위해 국민 연합을 조직하고 전후 복구를 위해 애쓰지만, 1953년 공식 정계에서 은퇴하고 있다가, 1958년 알제리 전쟁으로 인해 제4공화국(1946~1958)이 내각에 불만을 품은 군부 쿠데타로 인해 붕괴할 직전까지 내몰리면서 드골의 복귀 목소리가 나오게 되면서 다시 등장해서 내각 총리에 오르게 된다. 6개월간의 총리를 지낸후 1958년 10월 국민 투표를 통해 이원집정부제를 실시해 제5공화국을 탄생시킨다. 이로 인해 프랑스가 가지고있던 식민지가 독립을 할 수있거나 새 헌법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며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대통령
드골은 5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2차대전당시 나치부역자를 심판하는 정책을 펼친다. 1960년에 모든 아프리카식민지들이 독립하는 대신에 프랑스 연합이라는 국제기구를 결성하는데 이것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있는 프랑스 연합인 프랑코포니(La Francophonie)이다. 1958년부터 이어져오던 알제리 전쟁을 1961년 알제리에 자치권을 부여함과 동시에 민족자결 원칙을 인정해 투표로 동의를 얻어 에비앙 협정(1962)으로 깔끔하게 매듭지어지면서 알제리가 공식적으로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현재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경제 공동체(EEC)를 창설해 유럽의 민족주의 부흥을 돋구기위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게 이 때 인 1963년이다. 프랑스 혼자서는 불가능한 사업을 주변국들이 필요한 상태로서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1876~1967)와 오랜 갈등을 종식시키고 경제, 외교협력을 추진하게 된다.
드골은 이원집정부제라는 형태의 구조를 채택해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을 했다는 평을 받는데, 유럽국가들중 최초의 정치형태로서 초월한 대통령제라 분류되기도한다. 이후 1968년 5월 프랑스 5월 혁명이 터지면서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대해 변화를 촉구하게 되면서 군대와 시민들간의 충돌이 크게 번지게 되면서 정부가 붕괴되기 직전까지 가자, 1968년 6월 말, 의회를 해산시키고 총선을 다시 실시하게 된다. 드골은 1969년 지방행정, 상원개혁에 대한 개헌건 국민투표(사실상 드골의 대통령 신임도를파악하는 선거)에서 패하게 되면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나게 된다.
사망
드골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난 후 1970년 11월 심근경색으로 사망한다.